영화를 보다
시암 썬셋
라파엘Park
2010. 6. 26. 02:56
|
시암 썬셋을 보았다.
여느 영화처럼 아주 평이한 출발-아니 어쩌면 이것도 반전을 위한 복선이었을 수도-이었다.
주인공 페리가 퇴근하고 귀가한다.
여기까진 적당한 음악과 영화를 만든 주요인물들의 이름들이 들락거린다.
영화는 귀가한 회사원 페리-주인공의 직업은 새로운 색깔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가
아름다운 부인과 정원을 가꾸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나중에 알게되는데 페리는 부인과의 추억이 담겨져 있는 시암에서의 노을 색깔을
만드는 일에 열중이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부부의 다정한 한때가 그려지고,
잔디밭에 누운 부부는 그 자체로 평화로운 한폭의 그림이다.
페리 곁에 누운 부인의 화사한 웃음... 아름답다.
그런데 ...
행복의 정점에 있는 듯 보이는 페리가 바라본 하늘,
저 멀리에서 무언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잘못봤나?
저게 뭐지?
......
미처 페리가
날아온 물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아니, '어?'하는 의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 물체는 방금 자신의 옆에 누웠던 부인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부인은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냉장고에 깔려 버린 것이다.
나 역시
어? 하는
경황없는 외마디로
당황스러운 영화의 도입을 지켜본다.
그리고 영화는 작정한듯
주인공 페리가 어떻게 머피의 법칙의 제물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며 속으로는 '참, 잘도 꼬인다.'며 혀를 찬다.
그런데 페리가 곤경에 처하는 상황마다
코믹하다.
그렇다고 아무리 관객이지만 곤란한 처지를 보며 드러내고 웃을 수도 없고...
그리고 그 절정은 여행에서 만난 그레이스가
페리의 부인이 하늘에서 떨어진 냉장고에 깔려 죽었다는 얘기를 듣는 장면이다.
페리의 불행에 웃어서는 안되는 상황인데
그레이스는 속 깊은 곳에서 터저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도 웃어서 눈물까지 날 정도로 기어코 폭소를 터뜨린다.
옆에 있던 페리도 그러고보니
우스운 상황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 죽음의 주인공이 부인이라는 것을 잊었는지
아니면 그레이스의 웃음이 전염됐는지
그칠 줄 모르고 웃는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영화의 말미에서 페리는 그토록 찾았던
시암에서의 노을 색깔을 만난다.
여행과 더불어 소동을 끝내고
돌아가는 관광버스에 탄 일행중에
페리와 그레이스는 보이지 않는다.
둘은 시암 썬셋 색깔로 도배된
한적한 고속도로 휴게소의 벤치에 누워있다.
함께 하자고 약속한 듯 손을 잡았는데
잡은 손 밑엔 독사가 또아리를 틀고 있고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란히 누워 햇볕을 즐기는 두 사람 주위로
냉장고를 위시해 갖은 육중한 물건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린다.
페리에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냉장고는
불행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제 그 불행들이 비처럼 내린다.
그런데도 둘은 편안하고 행복하다.
불행이 비처럼 내리는데도 ......
2008/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