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에서 마법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믿음의 충돌에 대해 2

라파엘Park 2010. 6. 26. 01:59

저번 글에 이어서 ...

 

잘 안되는 까닭은 그 순간에도 머리가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지상정이라고 무언가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머리가 어떤 속셈을 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려운 일이 아니라 이런 경우는 거의 자동이나 다름없다. 

 

머리는 기본적으로 믿을 줄을 모른다.

머리에서는 믿음이 자라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머리가 믿음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믿음을 앎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머리가 앎으로 대체할 수 있는 믿음은

굳이 얘기하자면 믿음의 쭉정이 같은 것이다.

그건 차마 믿음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들인 것이다. 

 

가슴으로, 온 몸으로,

온 존재로 믿을 때

그제서야 믿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석과 같은 믿음'이라고 할 때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다.

 

'아, 이렇게 한다고 해도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이루어진다는 것인가?'

이런 의심 자체가 믿음의 결핍을 방증한다.

 

믿음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함정에 빠지기 쉽다.

 

어떤 것이 이루어지기를 유도하는게 그것이다.

이 경우는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간절히 믿고 있다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위의 경우에도 간절함은 누구 못지 않긴 할 것이다.

그러나 우주는 원하는 바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가 제대로 된 명령어를 입력하기까지

제대로 된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 것과 같다.

 

위의 경우라면, 우주는 진정한 믿음을 알도록 유도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알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주는 집요한 방식으로 믿음을 시험한다.

우주가 주는 혹독한 그 시험들을 모두 지나야

제대로 된 믿음이 자라난다.  

 

믿음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머리가 작동하는, 아니면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자신을 속이는 일들의 배후에는

에고가 있다.

 

에고는 자신의 유지를 위해서

믿음을 조종한다.

이렇게 조종 당하는 믿음이 머리에 있는 믿음이며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

그것이 가슴으로 내려와 있는 거 같아도

에고가 배후에 있는 한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희극적이며 비극적인 이 아이러니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에고의 모든 포기 뒤에

에고의 무덤 위에

자라나는 믿음의 싹...

 

그것을 잘 살펴 키울 때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에고가 벌이는 일을 비극이라 할 때

진정한 믿음의 과실이 마법이다.

 

'비극에서 마법으로 ......'가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위의 사실을 믿습니까?  ㅋㅋ





2009. 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