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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승리할 것인가? 2 : 진실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

라파엘Park 2010. 8. 28. 15:18

어떻든 살아남긴 한다고 볼 때,

그렇다면...

'그 마지막에서 진실은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이 남는다.

 

사람들은 '진실'이 승리할 것이라고 배워왔고, 또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럼에도 '진실이 승리할 것인가?'라고 물어야 하는 것이

현실은 배운대로 되지만은 않는다는 경험 때문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으로만 본다면, 사실 '진실'은 실패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의 국새 파동, 오은선 대장의 칸첸중가 등정 여부,

공직 내정자들의 청문회 증언, 천안함 의혹들 ...

온통 '진실'이 조롱당하고 있는 일들 뿐이다.

 

이 현실이 가능하게 된 이면에는 '진실'이 승리할 것이라고 배우긴 했지만

현실에선 별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동의하는 사람들이 과반을 넘었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MB정권이 가능했던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

 

궤변이겠지만, '진실'을 가린 거짓이 승리하더라도

혹세무민하는 자들은 거짓을 '진실'이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세무민하는 자들에게는 '진실'이기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것이 '진실'이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거짓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거짓이 나쁜 것임을 그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진실'은 항상 승리할 것이지만,

문제는 왜곡된 '진실'이 승리하면 모두가 불행해 진다는 것이다.

 

'진실'이 왜곡되기 위하여 많은 부당한 일들이 벌어져야 할 것이고

거짓을 말하는 자들은 더 많은 거짓을 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욕망이 만들어낸 괴물에 대해 언급했는데

사실 괴물을 만들어낸 그 욕망의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

 

두려움 때문에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많이 갖기 위해서

'진실'을 내팽개칠 수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것도 이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무현이라는 존재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진실은 승리할 것인가?'라는 물음의 답은 명확해졌다.

두려움을 떨친 사람들이 과반을 넘을 때 '진실'은 승리한다.

(현실적으로 과반이 넘어야 선거에서 이기기 때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당신은 '진실'의 승리를 위해 두려움을 떨쳐 낼 수 있을 것인가?

 

때론 희생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신은 '진실'의 승리를 위해 두려움을 떨쳐 낼 수 있을 것인가?

 

이 두려움을 떨쳐낸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 했다.

 

 

욕망이 질주하는 사회는 파멸이 예정되어 있다.

고삐가 풀린 욕망은 민주주의를 할 수가 없다.

민주주의는 욕망의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 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증오의 대상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욕망이 파멸을 막을 수는 없다.

욕망의 목적은 더 많이 채우는 것이지 그외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4대강,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보라)

 

그렇기에 마치 불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것처럼 종국에는 욕망의 주체마저도 욕망에 희생된다.

타이타닉이 침몰하듯이 선장이고 승객이고 상관없이 모두가 물에 잠기는 것이다.

 

이번 인사청문회에 대해 정권과 한 배를 탄 보수신문들이

한 목소리로 MB와 한나라당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그 이유다.

보수마저도 MB정권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것은 카나리아가 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처음에 했던 물음을 바꿔야겠다.

''진실'은 승리할 것인가?'가 아니라 '진실'은 승리해야만 하며,

''진실'은 승리할 것인가?'가 아니라

''진실'의 승리를 위해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가 있느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