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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깨달음에 대한 많은 정의가 있는 가운데 근래에

신이 정의하는 '깨달음'이 새삼 와 닿는다.

다시 한번 '깨달음'에 대한 신의 정의를 옮겨 본다.

 

  "...  뭔가를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기 전에 직관력과 심능력을 사용하여

   자기 내면깊이 들어가 자신의 느낌과 만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중에

   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 또한 아주 드물다. 하지만 네가 이렇게 한다면, 너

   는 경쾌함 이상의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너는 무거운 진동과는 전혀 관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네가 관찰하고 창조하고 체험하고 표현하는 모든 것의 진동을 가벼워

   지게(lighten) 할 것이다. 너희는 이것을 '깨달음(enlightenment)'이라 부를

   것이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

 

신의 정의에 따르면 '깨닫는 과정'은 다음 3단계로 단순화 시킬 수 있어 보인다. 

 

'뭔가를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기 전에

직관력과 심능력을 사용하여 자기 내면깊이 들어가 자신의 느낌과 만난다.'

 

'이렇게 하면, 무거운 진동과 관계하지 않게 된다.'

 

'관찰하고 창조하고 체험하고 표현하는 모든 것의 진동을 가벼워지게 한다.'

 

다시 살펴보아도 훌륭하다.

하긴 신이 정의했으니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그것은 '자존감'이다.

위의 3단계 이전, 방황하는 시절에는

'자신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딱 알맞게 쓰이는 시점이 있다.

 

그러나 위의 3단계를 거치면서

자연스레 지나가는 지점이 '자존감'이다.

이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미묘한 어떤 것이 더 추가된 것이다.

 

이 '자존감'을 만나지 못하고

타인으로부터 존중받으려는 마음의 발로는 

또다른 허덕임의 연장일 뿐이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지극히 아름답다.

 

이것은 네가 다른 이에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네가 다른 이에게 준 것을 자신이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출발은 자신이다.

자신에 대한 존중이 먼저라는 것이다.

 

내면에 있는 자신과의 만남

그 느낌이 살면서 자연스레 펼쳐지고

그 펼침은 자연스러워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가볍게 한다.

 

이제 무엇이 선후라도 할 것 없이

말과 행동에 권위가 생기고

'자존감'이 일어난다.

 

이 '자존감'이 신에 대한

경배다.

 

이 '자존감'이 흐르도록 하라.

이제 개체는 하나의 순환을 완성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무아'

'무위'

'너 자신을 알라.'

이런 가르침들은 같은 뜻의 다른 말이었다.

 

비극에서 마법으로 ...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

 

 2009. 4.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