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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

대화, 세번째: 새로운 날을 위하여, 그렇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 - 제가 하는 행동이나 생각을 모두 부정하고 나면, 즉, 내가 아니다를 계속 반복하다보면, 어느순간 저와 분리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부러 분리하려고 하면 좀 어렵지만, 제 행동과 생각이 낱낱이 보이게 되고, 물론 에고도 있음을 알지만 별로 문제될 건 없는데요. 이러한 경우에는 마치 소화가 되지 않는양 가슴쪽에 뭔가 있습니다. (별로 좋게는 느껴지지 않네요...) 예전에 본 포로수용소의 죄수가 고문을 이겨내기 위하여 썼던 방법인 듯 한데요... 하지만, 명확하게 생각이 보이고, 행동이 보이고, 말할 때도 상관없고, 공포도 보여지는 점 등등등은 좋습니다만, 뭔가 순화를 하여야 할지 속이 좀 꺽꺽 거리게 되네요... 제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좀 궁금하네요... 예전에 이러다가 아닌 것 같아서 말았던 기억이 .. 더보기
대화, 두번째: 당신의 에고는 안녕하십니까? 첫번째 대화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첫번째', '두번째'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편의상 붙인 것입니다) ...... -아~~~ 어렵고도 쉽지 않네요... ㅠ.ㅠ 저는 제 스스로를 에고가 떨어져 나갈 초기 단계에 있다고 보고 싶습니다... 현재와 있다는 느낌에는 몸 하나하나 움직일 때마다 기쁨과 희열이 존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중에도 도대체 이 에고는 왜 갑자기 불현듯 나타나나요? 스스로를 드러내고 스스로가 사라져 주면 안될지 참으로 답답하군요... 이러한 중에도 계속 지켜보겠습니다만, TV를 보거나, 메일등의 글을 읽고 쓸 때 이넘의 에고는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답답하네요... 위의 글에는 답글을 달지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어떻든 질문을 주신 분은 이 단계에서 에고의 꼬리를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 더보기
대화, 첫번째: 비극에서 마법으로, 그리고 ... 프롤로그 앞서 소개한 어떤 분과의 대화를 정리했다. 정리를 해놓고 보니 비교적 분량이 꽤 된다. 닉네임과 개인적인 신상에 관한 대화는 뺐다. 지금까지의 그분과의 대화가 '비극에서 마법으로'라는 블로그의 성격에 가장 충실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분의 양해를 얻어 공개하게 되었다. 대화를 공개해도 좋다는 그분은 대화의 공개가 영성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내성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밝혔다. 여기서 명백히 할 것은, 영성의 길을 걸어가는 데에 현재 걷고 있는 -누구든 상관없이 영성의 길을 걷고 있다면- 자신의 길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낫거나 못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 이 대화는 읽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정도가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전혀 생소한 내용이어서 무가치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 더보기
깨달음의 그늘:악마성 전에 쓴 글에서, 에고의 거의 마지막이다시피한 치명적 유혹 중에 하나가 '스승'이라는 레테르라고 했던 적이 있다. 오늘은 그 '스승'이라는 딱지를 떼고 보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나름 완성으로 가는 여정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이 '그림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깨달음의 그늘"이라고 이름 붙여본다. 이런 일이 있었다. 게시판에서 알게 된 분들을 만났고 자연스레 '도道' 이야기가 주제가 되었다. 어쩌다보니 질문을 받는 입장이 되었는데 답변을 하고 나서 살펴보니 나도모르게 목소리가 커져 있었고 단정적인 표현을 많이 썼다. 뒤늦게라도 사과를 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은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알게 된 것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에.. 더보기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믿음의 충돌에 대해 2 저번 글에 이어서 ... 잘 안되는 까닭은 그 순간에도 머리가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지상정이라고 무언가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머리가 어떤 속셈을 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려운 일이 아니라 이런 경우는 거의 자동이나 다름없다. 머리는 기본적으로 믿을 줄을 모른다. 머리에서는 믿음이 자라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머리가 믿음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믿음을 앎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머리가 앎으로 대체할 수 있는 믿음은 굳이 얘기하자면 믿음의 쭉정이 같은 것이다. 그건 차마 믿음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들인 것이다. 가슴으로, 온 몸으로, 온 존재로 믿을 때 그제서야 믿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석과 같은 믿음'이라고 할 때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다. '아, 이렇게 한다.. 더보기
깨달음에 대한 잡설(雜說) 깨달음은 무엇일까? 깨달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실로 많은 답변이 가능하고 또 각각의 답변마다 나름의 적절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많은 답변에다 하나 더 보태 본다. 이때, '과연 당신이 깨달음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라는 반문이 가능할텐데 반문(反問)은 반문하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고 이야기를 진전시켜 보겠다. 간단히 말해 깨달음은 오류 혹은 착각의 시정이다. 뭇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은 나와 우주와의 분리감이다. '나'와 세상 ... 그들에게 존재는 최소한 위의 언급이거나 둘 이상인 것이다. 붓다가 수행을 통해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깨쳤다면 예수는 같은 말을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했다. 여기까지가 깨달음이라는 마라톤의 반환점이다. 그리고 이제 위의 두 가르침을 합쳐 '네 이.. 더보기
툴레의 <Now>를 읽으며 깨달음의 쓰임을 생각하다 요즘 에크하르트 툴레의 를 읽고 있다. 전에 사뒀다가 손이 가지 않아 제쳐두었는데 지하철 이용시간이 늘어나면서 뭔가 읽을거리를 찾다가 만나게 된 것이다. 이제 한 3분의 1을 읽었나 싶은데 반가운 친구 하나 알게 된 흐뭇함에 기분이 좋다. 그것은 툴레가 얘기하는 '에고'가 내가 알고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툴레는 '에고'를 누구에게나 있는 '기능장애'로 보고 있다. 그리고 '에고'를 자각하는 일만으로도 '기능장애'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문명은 이 '기능장애'가 쌓아온 역사의 축적물이며 이 '기능장애'가 버젓이 존재하는 한 과학, 철학, 예술 등 그외의 어느 분야이건 광기의 발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좀 과격하게 말을 옮긴 면이 있으나 '에고'를 '기능장애'로 보.. 더보기
침묵 침묵은 고요에서 나온다. 그 침묵은 침묵을 위한 침묵이 아니다. 그냥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상태다. 오래동안 이 상태가 유지된다면 에고가 떨어져 나간다. 침묵은 그래서 아름답다. 2008. 10. 15 더보기
빨리 깨닫는 방법 부연설명 사실, '깨닫다'에 대한 의미가 워낙 제각각이라 에서 제시한 방법으로 정말 깨달을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시즌1에서 제시한 방법은 그女의 내면에서 들리는 어떤 '목소리'에게 빨리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졸랐을 때 '목소리'가 알려 준 방법이었고, 그것은 개인적으로 많은 효과가 있었다. 시즌2는 그 이후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것이다. 워낙에 게으른 탓에 지속적이고 열정적인 수행을 했다고 자부하지 못하지만 돌이켜보면, 모든 일에 자신을 돌아볼려고 했던 어떤 안테나가 의식의 한 쪽 구석에서나마 세워져 있었던 게 아닌 것인지 ... 그 결과 사티(sati)의 대상이 되었던 내안의 '나'가 어느날 떨어져 나가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것이 떨어져 나갔다.'.. 더보기
시즌 2: 빨리 깨닫는 방법 2 서론이 길었는데, 사실 서론이 긴 거치고 제대로 된 게 없다는 속설이 그냥 있는 거 아닌 바에 이번 시즌2가 용두사미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계속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는 뱀의 꼬리일 망정 나름 쓸 데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다. 각설하고, 서론에서 에고의 속성에 대해 자질구레 토를 단 것은 그만큼 이번 시즌2는 에고에 대한 이해가 필수인 까닭이다. 수행은 명상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고 '나'를 주장하는 에고에게 조복을 받는 것이다. 이 과정은 다음처럼 크게 나눌 수 있다. 먼저, 자신이 무지했음을 통렬히 뉘우친다. 명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바른 수행법을 만나 익힌다. 수행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힘을 기른다. 그 힘을 바탕으로 '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것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더보기
<믿음>에 관한 부연 설명: 살아 돌아온 믿음과 믿는대로 될지어다 착각은 자유라고 했으니까, 이왕 믿음 이야기 나온 거 마저 할려고 합니다. (근데 나, 왜 갑자기 이렇게 쀠~휠 받았지?) 사실, 믿음은 말로 표현되어질 때 훼손되는 성향이 있습니다. 굳건한 믿음은 말해질 필요가 없겠죠. 그러므로 누군가가 '믿습니다.'라고 할때 이것은 엄청난 진술이 되거나 혹은 그 반대로 동어반복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믿습니다'란 진술은 그 안에 믿지 못할 지도 몰라...하는 의구심이 싹트는 것을 내비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도 마지막 순간에,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며 물었듯이 믿음은 그가 깨달은 자든, 어떤 자든 인간에겐 영원한 숙제라고 봅니다. 믿음은 처음에 쉽게 쓰였다가 앎과 이해에 자리를 내주는데 이 과정에서 믿음이 많이 오그라들고 .. 더보기
<무지>와 용기 공교롭게도 자신이 했음을 아는 것은 자신이 느끼게 됐을 때 뿐이다. 의 속성상, 다른 사람의 지적은 전혀 소용이 없다. 자신의 를 돌아보는 것은 에고가 용납하기 어려운 일 중에 하나다. 에고의 상처는 쉽사리 치유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 상처가 피워올리는 분노의 불길은 맹렬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때가 마법의 순간이다. 모든게 남김없이 소진될 때, 비로소 무엇이 피어난다. 화염에 휩싸였을 때는 끝이 보이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수북히 쌓인 잿더미 위로 삶이라는 여전한 새싹이 꿈틀거린다. 그러나 새롭게 돋는 싹은 삶이 어제의 삶이 아니라 한다. 상처로 얼룩졌어야 할 에고가 불태워진 자리에 돋아나는 새싹은 그래서 우리가 절망하지 않아야 할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는 자신이 무지하지 않다라는 믿음이 굳건할수록 더 .. 더보기
비극에서 마법으로 36계 버전 2천여년 전, 예수의 외침이다. 예수는 귀가 있으면서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눈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들어달라고, 보아달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예수의 외침이 거의 쓸모없을 정도로 소모적이라는 데에 있다. 이건 아이러니다. 만일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 외침을 알아들었다면 예수는 굳이 외치지 않았을 것이고 또,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한 예수의 외침이 그들에게 전달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극이 마법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 안의 치워져야 할 것이 있다. 들리는 것을 들리는 그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나'라는 자아, 에고가 떨어져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것도 애매하다. 그 에고라는 녀석은 기를 .. 더보기
다시 읽는 도마복음 7절: 복(福)과 화(禍)에 대한 예수의 정리 주제넘게 도마복음 읽기를 해보겠다고 나선 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진도도 질척거리고 므흣하게 풀어진 것도 별로 없는 거 같아 궁색한 변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글이라는게 진중히 앉아 써도 속도가 나지 않을 때는 불면의 밤을 보내기가 일쑤라 현업에 바빴던 1월 한달은 내가 봐도 블로그에 소홀했다. 그동안 간간이 관리했던 블로그를 다음은 2009 우수블로그로 선정해 주었다. 의외의 소식이라 기분이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우수블로그'라는 분류는 서서히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약간 등 떠밀리는 느낌은 있지만 이것도 내가 좋아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아무튼 '우 수블로그'라는 분류가 무색해지지 않게 노력할 일이다. 그건 그렇고, 도마복음 7절을 다시 음미해 볼려고 한다. '내멋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