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무엇일까?
깨달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실로 많은 답변이 가능하고
또 각각의 답변마다 나름의 적절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많은 답변에다 하나 더 보태 본다.
이때, '과연 당신이 깨달음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라는 반문이 가능할텐데
반문(反問)은 반문하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고
이야기를 진전시켜 보겠다.
간단히 말해 깨달음은
오류 혹은 착각의 시정이다.
뭇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은
나와 우주와의 분리감이다.
'나'와 세상 ...
그들에게 존재는 최소한
위의 언급이거나 둘 이상인 것이다.
붓다가 수행을 통해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깨쳤다면
예수는 같은 말을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했다.
여기까지가 깨달음이라는 마라톤의 반환점이다.
그리고 이제 위의 두 가르침을 합쳐
'네 이웃이 내 몸일 수 밖에 없는, 오직 '하나'임을 알고'
사랑을 실천하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필요해지는 것이 믿음이다.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깨달음의 첫번째 관문은 자신을 돌보기 위한 에고의 노력이
멈추어지는 것이다.
에고는 믿음을 통해 놓지 못한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많이 쌓아두어야 한다.
에고에게 그것이 권력이든, 돈이든, 명예든, 지식이든
무엇을 쌓느냐는 중요하지가 않다.
어떤 것이든 쌓아둔 그것이 자신을 지켜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에고는 쌓아두었던 것을 결국
내려놓아야 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고는 내려놓는 것을 뒤로 미루거나(영원히 미루고 싶겠지)
어떤 핑계를 대고 들고있는 것을 합리화 한다.
붓다나 예수의 가르침이 왜곡되는 까닭이 이것이다.
에고는 가르침을 신봉하지만 그것은 가르침일 뿐이지
자신이 그 가르침대로 살지는 않는다.
에고는 그 가르침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기에
가르침이 침범받는다고 느끼면 광분한다.
앎을 통해 깨달음의 반환점을 돌았다고 해도
정작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 경우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언제든지 에고가 붙들고 있는 것을 놓을 수 있게 된다면....
그런데 모두 알고 있는데 에고만 모른다.
반환점은 돌았지만 깨달음의 길이 멀고 힘든 까닭이 이것이다.
붓다가 모든 수행을 놓고 지쳐쓰러져 보리수아래로 찾아가듯
예수가 쿼바디스라고 외치고 모든 걸 내맡기듯
깨달음은 마치 모든 포기 뒤에 오는 것 같다.
그런데 에고에게 포기는 죽음과 같다.
깨닫고자 하는 사람에게 질문은 단순하다.
이제 선택할 것은 산 채로 죽을 수 있는가?이다.
이렇게 산 채로 죽은 후에는(에고가 제 자리를 찾은 후에는...)
진리를 살아내는 일이 남는다.
그래서 삶은 매순간 그에게 시련을 준다.
네가 알고 있는 진리를 이순간 살아낼 수 있는가? 하고....
여기서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마치 반석 위에 믿음이 세워지듯
굳건한 믿음이 진리를 살아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단순화해볼라치면 이렇다.
이분법을 넘어서 하나로 볼 수 있는지 (상생, 통합)
하나로 볼 수 있되
본대로 살 수 있는지... (무소의 뿔처럼 갈 수 있는지...)
그렇게 살고 있다고 ...?
그럼 됐지 뭐...
2009. 2. 23
'비극에서 마법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믿음의 충돌에 대해 2 (0) | 2010.06.26 |
---|---|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믿음의 충돌에 대해 1 (0) | 2010.06.26 |
스승의 길 : 에고의 은근하고 치명적인 거의 마지막 유혹 2 (0) | 2010.06.26 |
스승의 길 :에고의 은근하고 치명적인 거의 마지막 유혹1 (0) | 2010.06.26 |
죽음에 대한 2가지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 (1) (0) | 2010.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