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극에서 마법으로

스승의 길 :에고의 은근하고 치명적인 거의 마지막 유혹1


수행자에게 가장 은근하면서 치명적인 유혹이

'스승'이라는 레테르다.

 

경지의 깊고 얕음을 떠나서 수행의 완성을 눈 앞에 둔
많은 이들이 '스승'의 역할을 하면서 맛보는

미묘한 자기도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걸로 보인다.

 

아니 나오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나오려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듯 하다.

 

이때 개입하는 것이 자기합리화이다.
이 합리화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이라
에고에게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스승'이 되려하는 자는 놓친다.

 

자기도 모르게 에고가 벌려놓은 달콤한 함정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세상을 구원한다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고
이웃을 위한다는 작은 명분만으로도 에고에게는

큰 기쁨이 된다.

 

무엇을 위한다는 의식에서 나온 행위는 모두 에고가

벌이는 수작에 놀아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예수께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가

뜻하는 바가 이것이다.

 

무엇을 위한다는 의식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행위가 나올려면

그냥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홀로'된 자이며, '스스로'된 자이며
이렇게 '스스로'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스승'의 역할은 당연히 한계가 노출된다.

 

그리고 '스승' 자신이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수록
'스승'이 걸어가는 길은 이상하게 꼬이며 종내에는

삼천포로 빠지고야 마는 것이다.

 

'스승'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에고에 무너지는 데에는

제자의 책임이 적지 않다.

 

존재와 진리의 힘에 원천을 두지 않은
'스승'의 권위는 지적되고 시정되어야 하지만

제자는 합리화와 포장이 제자의 도리인양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자고 '스승'이고 제일 많이 합리화되는 논거가
'그도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그도 나같이 부족함이 있는 사람일 뿐이다.'

이것은 가장 만연한 합리화이기도 하고 비참한 합리화이다.

 

이런 합리화도 있다.
'달을 가리켰으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은 왜 보누?'

이것 역시 에고의 자기합리화이다.

 

주위를 살펴보면

온통 달을 가리키는 것 투성이다.

 

사실 인간이 저질러놓은(그렇다고 패배주의로 가자는 건 아님) 것들이 제외된

'자연' 그대로는 모두 달을 가리키고 있다.

 

이 단순한 일조차도 갖은 선글라스를 끼고 보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세상을 얼마나 많이 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과연 자신이 착용한 선글라스를 인지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렇게 보면 달을 가리키는 행위는

불필요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달을 가리키는 행위'가 필요하다면
그때에서야 비로소 '스승'이 필요하다.

(스크롤 압박으로 이어서 씁니다)

 

2008.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