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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서 마법으로

스승의 길 : 에고의 은근하고 치명적인 거의 마지막 유혹 2


그렇다, 그때에서야 ‘스승’이 필요하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연 앞에서
‘스승’이 되려하고, ‘스승’ 행세를 하려는 사람은
동어반복의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필요해지는 시점이 있다.
그것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찾아왔을 때이다.
듣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스승’이 된다.


어제 이쯤까지 썼을 때 그女가
아는 분과 함께 회사 근처로 찾아왔다.
같이 온 분은 몇 년 전 방송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알게 된 분이었는데
당시 촬영현장에서 나를 도왔던 그女와는 방송이 나간 이후로도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 친분을 쌓아왔었던 분이다.

저녁 대신으로 알맞게 튀겨진 통닭과 맥주를 마셨는데
술이 몇 순배 돌자 그 분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1년 전인가 그女가 그 분께 책 한 권을 선물했고
그 정성의 고마움으로 책을 읽었는데
잘 읽혀지지도 않고, 내용도 소화하기 껄끄러워
책장 한 구석에 묵혀둔 책을
얼마 전에 완독을 하고 내친김에 그 책의 후속편도 모두 구입해서
읽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이제까지 알던 세상을 달리 보게는 되었는데
여러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고 한다.

자연스레 그 분이 이것저것 물어보고
내가 알고 있는 만큼의 답변이 시작되었는데
이 상황이 방금 전까지, 내가 쓰던 상황이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살폈다.
에고가 웃고 있지는 않은지...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고
자정이 다 돼서야 이야기가 마무리됐다.


저녁에 쓰던 ‘스승의 길’이라는 글 때문이었는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다른 때보다 사티가 잘 됐다.

한편으로 드는 생각이 ‘세상이 참으로 빠르게 돌아가는구나’였다.
그런 글을 썼다고 ‘그런 너는...?’하면서
바로 확인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만남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살펴보니
에고의 준동은 없었지만
이야기할 때, 목소리가 높아지며 약간은 흥분했었다는 것이 알아차려졌다.
나름대로 비교적 만족한 사티의 결과지만
습은 잘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렇지, 잘 떨어지지 않으니까, 습이지.’



‘스승’이 잘못된 길로 가게 될 때
합리화로 많이 쓰이는 말중에 하나가
‘왜, 손가락을 보느냐?’라고 했었는데
진리를 알고자 하는 방편의 하나로 훌륭한 이 말이
이럴 때는 에고의 덫으로 미끄러진 ‘스승’을 위한 반전의 도구로 쓰인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며 쏠쏠한 재미다.

에고는, 구도의 방편으로 훌륭하게 쓰여야 할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왜 보누?’의 본질을 흐림으로써
‘스승’의 흠결이 드러나는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다.

위의 방편에서 에고가 교묘하게 피해갈려고 하는 것은
‘손가락을 보는’ 주위의 시선이다.
그리고 정작 사람들이 보려하는 것은 ‘손가락’이며
이 ‘손가락’의 상태가 곧 ‘스승’의 상태이다.
이미 드러난(세상만물 혹은 자연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진리를 설파하는 ‘스승’이
삶 속에서 진리를 살아내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스승’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가 ‘스승’이고자 하면 놓치는 것이며
정작 문제는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어떻게 존재하느냐)이다.

진리를 살아내는 것은 손가락의 청결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니 이것을 호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스승‘에게는
흠결이 된다.

그리고 진리는 ‘달’처럼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이 비뚤어지고 왜곡되고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진리의 다른 모습일 뿐이지
진리와는 어긋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


그러니 이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진리를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나오는 원천인 그 사람 자체가 아닐까?

영성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인정하고
결국은 영성과 현실이 둘이 아님을 알고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

‘스승’이고자 하지 않아서
비로소 ‘스승’이 되는 연금술을
펼쳐보이는 이가 있다면
그 스스로는 부인할는지는 몰라도
그가 가는 길이 ‘스승의 길’이 아닐런지......

 

 

2008.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