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썸네일형 리스트형 깨달음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 올해 4월20일에 '신이 직접 정의한 깨달음에 대한 흥미로운 정의'라는 글을 올렸더랬다. 올 한해를 정리하면서 그 글을 다시 올린다. 불철주야 '깨달음'을 갈망하는 분이라면 이 글을 완전히 소화해 보시라는 권유를 드린다. 신의 언급처럼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너희는 자신이 내보내는 진동, 에너지로 자기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지금 너는 자신이 들었던 이 모두를 말할 수는 있지만, 들은 대로 행하지는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너는 자신에게 이것을 되풀이하여 들려줘야 한다." ... 중략 "뭔가를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기 전에 직관력과 심능력을 사용하여 자기 내면깊이 들어가 자신의 느낌과 만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중에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 또한 아주 드물다. 하지만 .. 더보기 깨달음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균형감]에 대해 앞 전에, '홀로 가라'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상기했는데 홀로 가는 중에 중요한 것 한 가지 짚어보았으면 한다. 그것은 균형감이다. 자존감이 자신 만의 일로 한정되는 측면이 많다면 균형감은 자신과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십분 고려되어야할 것이다. 실제 영성적으로 많이 앞서 나갔다고 알려진 분들 중에서도 균형감을 잃은 탓에 헛발을 짚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을 보면 균형감이 깨달음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여기서 균형감은 당연히 기계적인 중립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다는 점에서 판단을 들지 않는 것과 많이 비슷하다. 판단은 세상살이에 아주 주요한 도구다. 아침에 눈 뜨고 밤에 잠 들 때까지 심지어 꿈 속에서까지 우리 손에는 판단이 들려 있다. 이.. 더보기 자존감 깨달음에 대한 많은 정의가 있는 가운데 근래에 신이 정의하는 '깨달음'이 새삼 와 닿는다. 다시 한번 '깨달음'에 대한 신의 정의를 옮겨 본다. "... 뭔가를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기 전에 직관력과 심능력을 사용하여 자기 내면깊이 들어가 자신의 느낌과 만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중에 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 또한 아주 드물다. 하지만 네가 이렇게 한다면, 너 는 경쾌함 이상의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너는 무거운 진동과는 전혀 관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네가 관찰하고 창조하고 체험하고 표현하는 모든 것의 진동을 가벼워 지게(lighten) 할 것이다. 너희는 이것을 '깨달음(enlightenment)'이라 부를 것이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 신의 정의에.. 더보기 신이 직접 정의한 깨달음에 대한 흥미로운 정의 엊그제 새벽 최종편을 다 읽었다. 거기 나오는 신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 너희는 자신이 내보내는 진동, 에너지로 자기 현실을 창조하 고 있다. 지금 너는 자신이 들었던 이 모두를 말할 수는 있지만, 들은 대로 행 하지는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너는 자신에게 이것을 되풀이하여 들려줘야 한다.' ... 중략 '... 뭔가를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기 전에 직관력과 심능력을 사용하여 자기 내면깊이 들어가 자신의 느낌과 만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중에 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 또한 아주 드물다. 하지만 네가 이렇게 한다면, 너 는 경쾌함 이상의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너는 무거운 진동과는 전혀 관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너는 네가 관찰하고 창조하고 체험하고 표현하는 모든 것의 진동을 가벼워 지게(l.. 더보기 깨달음에 대한 잡설(雜說) 깨달음은 무엇일까? 깨달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실로 많은 답변이 가능하고 또 각각의 답변마다 나름의 적절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많은 답변에다 하나 더 보태 본다. 이때, '과연 당신이 깨달음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라는 반문이 가능할텐데 반문(反問)은 반문하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고 이야기를 진전시켜 보겠다. 간단히 말해 깨달음은 오류 혹은 착각의 시정이다. 뭇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은 나와 우주와의 분리감이다. '나'와 세상 ... 그들에게 존재는 최소한 위의 언급이거나 둘 이상인 것이다. 붓다가 수행을 통해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깨쳤다면 예수는 같은 말을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했다. 여기까지가 깨달음이라는 마라톤의 반환점이다. 그리고 이제 위의 두 가르침을 합쳐 '네 이.. 더보기 툴레의 <Now>를 읽으며 깨달음의 쓰임을 생각하다 요즘 에크하르트 툴레의 를 읽고 있다. 전에 사뒀다가 손이 가지 않아 제쳐두었는데 지하철 이용시간이 늘어나면서 뭔가 읽을거리를 찾다가 만나게 된 것이다. 이제 한 3분의 1을 읽었나 싶은데 반가운 친구 하나 알게 된 흐뭇함에 기분이 좋다. 그것은 툴레가 얘기하는 '에고'가 내가 알고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툴레는 '에고'를 누구에게나 있는 '기능장애'로 보고 있다. 그리고 '에고'를 자각하는 일만으로도 '기능장애'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문명은 이 '기능장애'가 쌓아온 역사의 축적물이며 이 '기능장애'가 버젓이 존재하는 한 과학, 철학, 예술 등 그외의 어느 분야이건 광기의 발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좀 과격하게 말을 옮긴 면이 있으나 '에고'를 '기능장애'로 보.. 더보기 길 떠난 자의 사라지는 아름다움 과문해서 그런지 몰라도 내가 알기로, 정신세계를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깨닫고자 한다. 또, 그들-나를 포함해서-중 대부분이 세상살이가 팍팍하지 않았다면 정신세계를 알게 되지도 않았으리라. 정신(혹은 마음)공부의 열차에 오른 이들이 내릴 종착역은 깨달음이라는 이정표가 붙은 역일 것이다. 물론 이 열차는 도중에 언제든지 내릴 수 있는 열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은 의지를 갖고 열차에서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열차가 종착역에 닿는다는 보장도 없다. 게다가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고는 이 열차를 외면하기가 어렵다. 꼭 그렇지는 않을테지만, 마음 공부라는 여정에 올랐다가 여정을 멈추는 이들 대부분이 이런 아이러니에서 길을 잃고 만다. 종착역에의 도달여부는 오로지 의지가 얼마나 굳은가에 달려.. 더보기 내친김에 완전함의 기준을 궁리하다가 내친 김에 '완전함'의 기준은 무얼까? 궁리하다가 일단 글을 시작한다. 나는 우리가 늘 보는 자연(自然)이 '완전함'의 완벽한 현현이 아닐까 여긴다. 전에 어떤 글에서도 이 비유를 들었는데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일어선 꽃이 때가 되어 봉오리를 열어 향기를 터뜨리는 것은 '깨달음은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훌륭한 프리젠테이션 같다는 것이다. 봉오리가 열리며 마지막에 터지는 향기는 깨달음의 정점과 완벽한 앙상블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스럽지 못하면서부터 완전함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한편 나는 '완전함'에 대해 생각케 할 수 있는 이것 역시 완전함으로 여기고 감사해진다. 숫자 중에 열 십(十)字가 완성을 뜻하고,완전함을 상징한다는 말이 있는데 수긍이 가는 이야기라 생각하면서, 왜 그런가 .. 더보기 깨달음을 구하는 것에 대해 살아가면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된 사람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깨달음을 구한다. 그 집요함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것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집착중에 제일 마지막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물질 세상에서 숱한 환멸을 맛보았거나 트루먼쇼의 짐캐리처럼 이 세상에서의 비상구(EXIT)를 찾고 있는 중인 것이다. 집착의 제일 큰 하중이 실리는 만큼 깨달음을 구하는 일 역시 만만치가 않다. 이미 그것을 구했던 사람들은 알쏭달쏭한 말만 하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마케팅도 하고 있다. 마케팅이야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올바른 깨달음을 사는 것이 아니라면(살 수도 없겠거니와 살 수만 있다면야... 오죽 좋겠어요) 그 거래의 후유증은 건곤일척으로 구하는 집착이기에 쉽사리 치유되..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