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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서 마법으로

<믿음>에 관한 부연 설명: 살아 돌아온 믿음과 믿는대로 될지어다


착각은 자유라고 했으니까,
이왕 믿음 이야기 나온 거 마저 할려고 합니다.

(근데 나, 왜 갑자기 이렇게 쀠~휠 받았지?)

 

사실, 믿음은 말로 표현되어질 때

훼손되는 성향이 있습니다.

굳건한 믿음은 말해질 필요가 없겠죠.

 

그러므로 누군가가 '믿습니다.'라고 할때

이것은 엄청난 진술이 되거나 혹은 그 반대로

동어반복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믿습니다'란 진술은 그 안에 믿지 못할 지도 몰라...하는

의구심이 싹트는 것을 내비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도 마지막 순간에,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며 물었듯이

믿음은 그가 깨달은 자든, 어떤 자든 인간에겐 영원한 숙제라고 봅니다.

 

믿음은 처음에 쉽게 쓰였다가
앎과 이해에 자리를 내주는데
이 과정에서 믿음이 많이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지만
이 과정은 믿음이 자양분을 섭취하고 멀리 뛰기 위해

물러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때가

앎과 이해가 단단해져, 無知가 오롯이 이해될 때 입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 만을 안다.'라는 이해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믿음의 거듭남이 가능한 때인 것입니다.

 

이때의 믿음은 굳이 '믿습니다'라는 진술이 필요하지 않은 단계이기도 합니다.
이때는 어떤 필요에 의해 '믿는다'는 진술은 할 지언정

믿음의 진정성이 훼손되지는 않는 때인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와 에고의 여러가지 유혹(미묘한 우월감, 자기 합리화 등등)들을 지나
진정한 믿음의 싹이 자라나더라도
믿음은 언제든지 한순간에 전부가 날아가 버릴 수 있는

유리 같은 것이죠.

그렇기에 믿음이 그만큼 소중한 것이기도 하고요.

 

다시 살아온 믿음...

 

이제 온전한 믿음의 씨앗을 뿌리고

때 되어 거두는 일만 남았겠네요.

 

좀 거창하게 말하면 깨닫는다는 것도

이 온전한 믿음을 싹 틔우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구요.

 

 

2008.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