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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서 마법으로

완전한 깨달음?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


바라보기와 이곳(도론도담) 게시판을 살펴보면
'깨달음은 있다, 없다' 논쟁이

<깨달음은 '있다'로 모아지고, 그러나 완전히 깨달은 사람은 '없다'>로 가닥이 잡히는 느낌이다.

 

근데 내 딴엔 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한 게시판 분위기가 뭔가 찜찜했던지

추석 명절을 지나는 내내 내안에선 어떤 의문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출근을 하고, 업무로 하루, 이틀 보냈는데

속에서 울리는 '뭐지?'하는 의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자정이 넘었다.
나는 이 꼬리가 잘 잡히지 않는 의문을 파고 들기로 작정을 하고
게시판을 찾아 글쓰기 창을 열었다.
안개 속이라도 일단은 더듬거리면서라도

앞으로 나가보자는 심산인 것이다.

 

'뭐가 깔끔하지 않은 것일까?'

......

 

그렇지, '완전히'라는 부사가 주는 위압감이 먼저다.

 

<'완전히' 깨달은 사람은 없다>

......

 

완전히...?

...

 

...

 

일단 더듬어서라도 글을 시작하니 의문이 구체성을 띠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의문의 발단은 '완전히 깨달은 사람은 없다.'라는 진술에는
<완전히 깨달은 사람>은

'어떠어떠할 것'이라는 像이 들어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과연 <완전히 깨달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완전한 깨달음을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연휴내내 내면에서 어렴풋이 피어오르는 이 의문과 함께

머리에서 떠나지 않던 상징이 '무지개'였다.

 

그리고

그 '무지개'를 잡으러 떠난 소년의 이야기 ...

 

'무지개'는 있다.

그런데 그것을 잡으려한 소년은 무슨 일을 한 것인가?

 

끝내 그것을 붙잡지 못하고 늙어버린 소년 ...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런데 처연하다. 인간의 숙명 같은 것을 이야기 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한 순간에 늙어버리더라도
'무지개' 같은 것들을 잡기 위해

쉴새없이 뛰어 다녀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쯤에서

'깨달음'이란 더 이상 '무지개'를 쫓지 않게 하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인간에게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무언가를 쫓는 것'은 거의 자동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연히 그 추구의 대열에서 뒤처지는 자들은 낙오자나 패배자로 인식되곤 한다.

그런데 그 '추구하는 자'가 사라졌다.

 

무슨 일인가?
그 안에는 '추구하는 자'가 사라진 대신

조용히 응시하고, 감사하는 자가 들어섰다.

 

그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무지개'를 보고

자연이 확인시켜준 우주의 축복에 감사한다.

 

그렇다. 이제 나의 의문이 명확해졌다.

그것은 '이 단순한 일에 왜 <완전히>라는 부사가 필요한 지 ...?'였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전에 나는
'완전히 깨달은 사람은 없다.' 혹은 '궁극의 완전한 깨달음은 없다.'와

비슷한 주문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을 창조주라고 소개했던 목소리에게

'내 앞에 모습을 보여달라.' 했었던 것이다.

 

그 때 그 목소리는 '정 보고 싶으면 거울을 보라.'며 웃으며 넘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주문은 나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하지 않고

물었던 주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약처럼 느껴지지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 일어났던 일도

비슷한 일이 아닐까?

 

"저 사람은 다른 사람을 구원한다면서 자기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군.네가
정말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봐야 믿을게 아니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지?하나님이 너를 좋아하는지 안하는지

구해달라고 해보란 말이야!" (마 27:42∼43)

 

.......

 

믿음이란게 그런 것 같다.
무지할 때의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은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쉽사리 바뀌는 믿음이다.
정작은 믿음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 입으로는 쉴새없이 '믿습니다'를 외치면서도

양심은 믿음이 언제든지 깨질 수 있음을 알고 있는 단계의 믿음이다.

 

자신이 무지했음을 절감한 후에는 믿음의 소용이 사라진다.

믿음은 필요가 없어지고 이해가 자리한다.

 

마치 컴컴한 방에 불을 켜면 빛과 어둠이 양립하지 않는 것처럼

앎이라는 전등불이 켜졌으므로 굳이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앎이 자라나서 무르익으면 다시 믿음이 필요해지기 시작한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 앎의 최고봉은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뿐'이라는 소박한 앎으로 모아진다.

 

이 소박한 앎이 '추구하는 이'가 사라진 상태와 만나면

믿음의 점검이 필요해 진다.

 

수행을 통해 바른 견해에 의해 믿음이 키워졌는지
미세한 에고들에 의해 믿음이 왜곡되거나 합리화되진 않았는지

이러한 일련의 마무리 점검으로 믿음은 조심스레 펼쳐진다.

나의 믿음은 이러하다고...

 

인간이

광대한 우주의 바깥, 무의식, 무한 ... 神 .... 이런 것들을

제대로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그랬는가?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 (요 20:24-31)고....

 

......

 

뭐요? 아닌 것 같다고?

그럼 믿지 마세요.

 

복을 차 버리시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잖아요...

 

 

2008.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