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교육방송의 어린이프로그램에 들어가는
한 코너를 제작하고 있다.
엊그제인가 그 코너를 제작하는 PD에게
현장연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때 그 후배PD에게 예로 든 비유가
지나고보니 재밌는 거 같아 글로 옮겨보기로 한다.
현장연출에 대한 이야기는 그 후배PD를 야단치면서 나왔는데
제작편집한 영상이 자연스럽지 않고 작위적인 느낌이 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인위적인 연출을 최대한 배제하는 휴먼다큐멘터리와 달리
그 후배PD가 제작하는 코너는
어린이MC 두명이 일반 출연자와 함께 출연하는 제작의 속성상
최소한도의 설정이 용인이 되는
예능적인 요소가 많은 프로그램이긴 하다.
그런면에서 인위적인 연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그 후배PD의 항변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대부분이라
어찌보면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최대한 자연스런 촬영을 유도해야 하며
그 연장선 상에서 편집된 영상의 자연스러움은
리얼리티 확보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인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후배PD의 경우, 빡빡한 촬영시간-방과후에나 촬영할 수 있는
어린이MC인데다 늦은 저녁까지의 촬영은 피해야 하는-과
연출이 배제된 자연스런 촬영을 위해 필요한 길고 오래찍기가
충돌을 일으켜서
정해진 시간 내에 촬영을 마치기 위한
현장에서의 주문은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약간의 억울함이 섞여있는 후배PD의 하소연에는
선배인 나라도 같은 상황을 만났다면
자신과 마찬가지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라는
뉘앙스가 묻어났다.
곧,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현장연출을 했을 거라는
예를 들었다.
사실 후배PD가 들려준 정도의 난감함은
PD라면 누구나,
매번의 현장에서 만나는 어려움이다.
나는 당연히 예로 든 나의 해법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고 했다.
연출은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며
후배PD가 처한 상황에서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후배PD가 그 순간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연출을 통해 분명 더 나은 결과를 유도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후배PD는 내가 예로 든 해법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수긍하면서도
자신이 처했던 난감한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니
결과 만을 갖고 논하는 지금은 무슨 얘기를 한다 해도
그때의 자신을, 그때의 모든 어려움을
내가 알아주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래서 미로에 들어서는 비유를 들려줬다.
미로에 들어선 사람은 그가 평범하든 비범하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라도 헤매지 않을 수가 없다.
거기에 어떤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막혀있는 벽 앞에서 하는
최선을 다했다는 위안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답은 분명이 있으며
미로의 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에게
나가는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아무리 어려운 진퇴양난이라 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정도까지는
동의를 얻어낸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적고자 한 비유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내친 김에 후배PD에게 떠들어 대기를 계속했는데
그것은 그가 연출한 방식의 한계에 대한 것이었다.
나름으로는 꼼꼼하게 촬영했을 커트(Cut)들이
왜, 전체 이야기를 끌어가는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작위적인 느낌을 지우지 못했을까?
답은 이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위적인 연출이 최대한 배제된 채
자연스럽게 촬영이 되었다면
그 촬영본의 어느 부분을 떼어서 편집을 하더라도
편집본-물론 편집이 엉터리가 아니라는 가정하에-은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찍히지 않은 커트들은
어떤 조합을 이루어 내더라도
그 편집본의 자연스러움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아주 세련된 편집을 통해 그럴 듯 하게 보이게 할 수는 있다.)
그래서 그런가
아주 우연의 일치처럼 최근 읽는 책에서 발견한 아래의 경구는
역사 속의 위인들이 허당이 아니라 명불허전임을 증명하고 있다.
<거짓에는 무한한 조합이 있지만
진실의 존재 방식은 하나뿐이다.>
- 장 자크 루소
오늘밤 루소에게 경의를 ...
루소가 본 진리에게 경의를 ...
그리고 살아서 경의를 표할 수 있게 한 이에게도 경의를 ...
2009. 3. 31
'비극에서 마법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달음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균형감]에 대해 (0) | 2010.06.26 |
---|---|
신이 직접 정의한 깨달음에 대한 흥미로운 정의 (0) | 2010.06.26 |
하나는 둘이요, 둘은 하나다 (0) | 2010.06.26 |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믿음의 충돌에 대해 2 (0) | 2010.06.26 |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믿음의 충돌에 대해 1 (0) | 2010.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