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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턴 프라미스...
번역하자면 '동쪽의 약속'(?) 정도가 될 듯 싶다.
우리나라에선 '동쪽' 그러면 동해가 연상되고
연이어 그곳으로 떠오르는 해가 떠오른다.
그래서 우리에게 '동쪽'은
희망의 다른 이름처럼 쓰이곤 하는 것 같다.
반면에 유럽에서 '동쪽'하면
이 영화에서처럼
동토의 땅, 러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이발소에서의 잔인한 살인으로 시작한다.
유혈 낭자한 도입이야 그렇더라도
미처 엉덩이가 좌석에 안착하기도 전에
가감없이 보여지는 갑작스럽고 무지막지한 살인 행각을 통해
감독은 관객에게 폭력의 느닷없음과 어이상실을 쏟아 붇는다.
'금세기 최고 걸작'이라는 포스터를 들여다보다가
데이빗 크로넨버그라는 비교적 낯익은 감독이 눈에 띄어
주저없이 관람을 선택했는데
영화는 후반부의 어정쩡한 결말이 아니었다면
리얼한 폭력 묘사와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긴장감,
굳이 연기라고 이름 붙이는 것마저 민망하게 할 정도의
완벽한 연기들로 인해
포스터의 주장이 쉽게 공감이 갈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아마 영화의 결론도
감독의 입장에선 최선의 선택일테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의 전작 <폭력의 역사>를 보지 못하긴 했지만
감독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내는 폭력이
번듯해 보이는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한 축임을 상기시킨다.
영화 속의 인물들로만 보면
폭력은 생존을 위한 본능에 가까워 보인다.
폭력은 '동토에서의 -잘 살아보겠다는- 약속'을 이루어주는 수단이지만 동시에
아이를 낳고 죽은 14살 러시아 소녀 같은 희생자들의 피를 제단에 올린다.
그나마 위안은 폭력의 뒤안길에는 항상 폭력이 아니라 간호사 안나(나오미 왓츠)처럼
'사랑'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잔악무도한 폭력이 조직의 유지를 위해 거리낌 없이 사용된다.
영화는 사실 이런 것들을 영화 속에서 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는 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감독이 의도한 바(폭력의 상기)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목욕탕 격투 씬'은 최고의 연출과 연기, 촬영이 이루어낸
이 영화의 백미이다.
영화는 잊혀져도 뇌리에 각인된 이 장면은 지워지지 않을 듯 하다.
끝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연기자들의 이름을 적어보는 걸로
그들의 연기를 경배한다.
주인공 니콜라이(비고 모텐슨)의 냉혹함
인자한 얼굴 뒤에 숨어있는 악을 표현한 보스 세미온(아민 뮐러 스탈)의 카리스마
인간의 나약함으로 폭력의 경계에서 부유하는 아들 키릴(뱅상 카셀)의 우유부단
난무하는 잔혹한 폭력 속에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할 이유가 되는 안나(나오미 왓츠)의 아름다움
14살 러시아 소녀가 남긴 일기로 겨우 기억할 수 있게된
동토에서의 약속 ......
행복하고자 했던 소녀의 소망은
얼어붙은 땅에서 싹을 틔웠었고
그 소망은 아이를 통해 자란다.
그럼으로써 '폭력의 역사' 만큼 끈덕진
'소망의 역사'가 쓰여지는 것이다.
2008/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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