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된 사람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깨달음을 구한다.
그 집요함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것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집착중에 제일 마지막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물질 세상에서 숱한 환멸을 맛보았거나
트루먼쇼의 짐캐리처럼 이 세상에서의 비상구(EXIT)를 찾고 있는 중인 것이다.
집착의 제일 큰 하중이 실리는 만큼
깨달음을 구하는 일 역시 만만치가 않다.
이미 그것을 구했던 사람들은
알쏭달쏭한 말만 하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마케팅도 하고 있다.
마케팅이야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올바른 깨달음을 사는 것이 아니라면(살 수도 없겠거니와 살 수만 있다면야... 오죽 좋겠어요)
그 거래의 후유증은 건곤일척으로 구하는 집착이기에
쉽사리 치유되지 않는다.
일단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깨달음은 혼자서 가는 거다.
생활이 주는 갖가지 풍상 속에서도
쉼없이 자신을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깨달음이 어느새 도둑처럼 찾아왔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전에 바라보기에 올린 글에 언급했던 기억이 나는데
깨달음의 길은 풍진 세상같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물 위로 뻗어올라 꽃망울을 터트리는 연꽃 같은 것이요,
피어난 연꽃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깨달음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이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다.
어느 것도 뿌리가 든든하지 않으면 제대로 피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깨달은 자는 하나의 이정표다.
그는 단지 가리키는 역할이다.
그를 스승으로 만들어 섬기는 것은 그를 죽이는 일이며
또하나의 불상을 머리에 이는 격이다.
또하나 유의할 게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는 거,
뿜어내는 게 아니라 뿜어지는 것이라는 거...
때가 되어 충분히 영글었을 때
깨달음은 터진다.
그래서 그것을 가졌다고 하거나 더 나아가 인가를 해준다는 것은
깨달음의 집착이 빚어낸 블랙코미디다.
그런데 블랙코미디라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블랙코미디라고 생각없는 웃음만 흘리고 잠들어 있다면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 길로 가고 있다는
자기 최면의 깊은 잠속에서 헤어 나올 가망이 없는 것이다.
깨달음을 거창하게 만드는 이를 경계하라.
그것은 내면의 소리(양심)에 귀기울인 자들의 것이다.
그것을 비싸게 만드는 이를 멀리하라.
그것은 세상 일에 잣대를 내려놓고 자신의 일에 열심인 자의 것이다.
깨달음을 주겠다는 이를 살펴보라.
과연 그가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그리 하는지
그에게서 어떤 향기가 나는지 ......
그래서 예수는 그렇게 외쳤나 보다.
<마음이 가난한 자, 복이 있으니
하늘나라(깨달음)가 저희들의 것이라고...>
2008/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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