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나눈 이야기에선가 읽은 것 같다.
미술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그림을 그릴려고 하고 있는 아이 곁에 서서
빈 도화지를 들여다보며 아이에게 물어본다.
'그래, 무얼 그릴려고 하는거니?'
'하느님 얼굴이요.'
아이가 도화지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대답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그렇다. 그래서
'너는 하느님 얼굴을 본 적이 있니?'하고 묻는다.
그러자 아이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한다.
'아뇨. 근데 제가 그리는 대로 놔둬 보세요.'
......
물론 그 뒤로 아이가 그렸을 하느님의 얼굴에 대해선
더 이상의 언급은 없다.
이런 경우,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道를 구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엉뚱한 것을 붙들고 그것을 놓치기 일쑤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보는가?'
이는 道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석 중의 정석 같은
기본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 기본을 안다면서도
상황들이 조금씩 다른 외피로 바꿔입기만 하면
그것을 못 알아본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필시 위의 경우의 아이에게도
'애야, 너는 하느님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잖니?' 혹은
'그래 어디 그려봐라. 하느님의 얼굴이 어떤지 보자꾸나.' 할 것이다.
'?'
아무 것도 잘못된 것은 없다.
다만 그가 道를 구한다면, 神을 볼려고 한다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일 뿐...
예수는 '빛과 소금처럼 되라'했고
붓다는 '무아'라고 했다.
어둠 속의 방안에
촛불이 하나 켜진다.
촛불의 빛은 방안을 완전히 밝히진 못해도
방 안의 어둠과 고루 섞인다.
이제 창을 연다.
창 밖은 짙은 어둠 뿐이었다.
방 안의 빛이 조금이나마 창밖으로 퍼져 나간다.
어둠의 끝은 어디인가?
빛은 그 끝까지 퍼질 것이다.
이는 결정체로 있던 소금에게도 해당한다.
이것이 붓다가 얘기한 '무아'와 만나는 지점이 아닐까?
끝이 어디일지 고민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빛처럼 될 수 있는지
소금처럼 녹을 수 있는 것인지 살펴봐야 하는 것 아닐까?
내면의 빛을 등불로 삼았다면
창문을 열듯이
빛을 가리고 있던 '나'를 열어보자.
그럼, 아이가 얘기했듯
이렇게 밖에 얘기할 수 없을 지 모른다.
'나둬보세요. 제가 알아서 잘 갈게요.'
문득 비틀즈의 Let it be가 듣고 싶어진다.
2008.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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