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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서 마법으로

소감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완전한 깨달음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너른돌님의 '나는 왜 완전한 깨달음이 없다고 말하는가?'를 읽고
느낀 바를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런저런 일들로 미루다가

오늘에서야 컴앞에 제대로 앉았다.

 

개인적으로는 게시판에서 너른돌님과 은하수님의 논쟁이 있었던 때부터

너른돌님으로부터 이번 글과 같은 내용을 듣고 싶어 했었던 터였다.

그래서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렇다.

 

사실 너른돌님 같은 분들은 앞서갔다는 이유로 좋든 싫든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부담을 짊어질 수 밖에 없다.

 

바둑의 최고수라 인정받는 이창호와 이세돌이
최전방을 끊임없이 탐험하여 많은 애기가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이창호와 이세돌은 그 대가로 많은 대국료를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별다른 대가없이 좋은 글을 통해
이런 나눔을 하는 분들은 우리 사회의 소금 같은 분들이다.

 

이번 글에서 주목해야 곳은 제목이다.

제목은'완전한 깨달음'이 '없다'가 아니라
'왜, 없다고 말하는가?'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글을 읽었을 때 제목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글을 모두 읽고 나서 약간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제목을 다시 보고 또 이후에 너른돌님이 직접 댓글을 단 것을 보고

너른돌님의 의도를 재삼 확인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못 보고 있을 수도...)

 

글을 읽고 난 직후 떠오른 의아한 부분을

글을 통해 풀어볼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떠오른 아이디어 중에 하나가 숫자 1과 무한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오늘 너른돌님께서 숫자1의 비유를 통해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의 충실함을 강조하는 댓글을 단 것이다.

 

제목과 댓글의 확인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 쓰는 이 글은

너른돌님의 글에 대한 반론처럼 느껴질 내용이 대부분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너른돌님이 이번에 쓴 '나는 왜 완전한 깨달음이 없다고 말하는가'의 미덕은
갖은 어려움을 뚫고 내면의 깊은 골짜기를 탐험했던 분의 입을 통해

지금여기가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너른돌님은 '우리의 현재의식이 바로 궁극의 자리'라고 댓글에서 밝히고 계신데
이것은 궁극의 그 자리가 멀리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지금 이곳을 소홀히 하는

영성인들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다.

 

궁극의 자리, 우주, 무한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무한한 우주의 어디서건

이자리가 우주의 가장 바깥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곳은 없다.

 

공간은 있는데 한계를 특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한없이 작아지거나

바깥으로 한없이 커지거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주의 바깥을 특정할 수도 없거니와

가장 정확한 1cm도 영원히 잴 수 없다.

 

쫀쫀하게 따져보면, 우리가 사는 방식이 다 뭉뚱그려 지칭하는 것이요,

뭉뚱그려 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카이스트 예비학생에게 들은
우리의 존재방식은 재밌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하다.
그 학생의 말에 따르면
과학과 수학(전자,양자와 확률)으로 우리의 존재 방식을 살펴볼 때

우리의 존재는 확률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확률로 존재한다...?'

 

재밌는 발상이며, 어쩌면 이것이 보다 진실에 부합하는 진술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존재는 모순적이며, 이율배반적이다.
이것이 우주요, 신이며, 무한인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있다.'하는 것도 놓치는 부분이 있는 것이고

'무엇이 없다.'라고 할 때도 놓치는 부분이 생기고야 만다.

 

그래서 어떤 단정이나 선언은

자신의 삶을 규정하거나 방편으로 쓰일 때만 유용하다.

 

이번 너른돌님의 글은

방편이라 생각된다. 혹, 아닐지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나는 왜 .... 없다고 말하는가?'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너른돌님께서 '왜 완전한 깨달음이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지는

구구절절히 공감한다.

 

그만큼 道를 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며
길목마다 놓인 에고의 덫에 걸려

구도자가 망가지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완전한 깨달음이 있다고 말하고 싶을까?

 

나는 우리가 절대를 알고 본다고 해서

그것이 눈앞에 실현되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내가 정확한 점 하나를 찍기 위해
현재의 모든 과학과 기술을 동원한다고 해도
단순히 더 정확한 점을 찍을 수 있다는 개연성 만으로
정확한 점을 찍었다고 진술하는 것보다는
'정확한 점을 구할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것이 최선의 결과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현실이라는 것이다.

 

정확한 점을 찍기 위한 무수한 노력의 끝을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더 정확한 점을 찍으려 하는 현재의 행위 자체가

의미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런 아이러니가 신비 그 자체이며

삶이고 우주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확정짓고 구분짓고
이름 지으려 하는 부단한 노력은

에고가 하는 일이다.

 

우주는, 삶은 통째로

나눠지지 않는 신비인 것이다.

 

그래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열린
문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인간에게 숙명 같은 것일 것이다.

 

문 안으로 들어서라.
그것은 위험하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다.

들어서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들어선다면, 덫에 걸리는 것은 자신의 일이다.

 

나는 못된 심뽀라 그런지

덫에 걸리더라도 부추기고 싶다.

 

안으로 들어서라고 ...

위험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을 만나라고 ...

 

 

2008.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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