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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서 마법으로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에고에 대한 선전포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경구다.

이 경구의 다른 쪽엔 '현재를 즐겨라'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다.

 

이렇게 '죽음'이 언급되면 퇴폐적으로 나가는 게 보통으로 보인다.
그래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니까 지금을 즐기자.'라는 부추김으로 해석이 되고

'될 대로 되라'라는 뜻의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라는 자포자기에까지 이르고마는 것이다.

 

이 경구들을 퇴폐적으로 해석하니까 그렇지

달리 보면 이렇게도 된다.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기에 '현재에 충실'하여 깨어있겠으며

'당신 뜻대로 하소서' 그리하여 '되어지는 대로, 따르겠나이다.'

 

내가 보기엔 후자의 해석이 그럴 듯 하기도 하거니와

전자는 막나가고자 하는 인생의 자기 합리화 때나 주로 쓰이는 해석으로 보인다.

 

내가 블로그의 제목이나 온라인에서의 닉네임을 줄기차게
'메멘토모리'로 고집하는 까닭은
일탈하고픈 욕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을 끊임없이 예고함으로써 현재에 충실하자는 자기암시가

적당히 섞였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기도 하다.

 

이 바램도 어떻게 보면 비열한 줄타기처럼 비칠 수도 있는데
한편으론 모순처럼 보이는 이런 이중성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아닌가라는

자기 합리화라는 카드를 들이밀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들여다보면

재밌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네가 죽는다는 것을 알라.'라고 하지 않고 <기억하라>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이 <기억하라>라는 말은

성립이 안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죽어 본 적이 있어야 <기억>하고 자시고를 하지...)

 

마치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듯이 <알라>고 했으면

의문을 자아내지 않았을 텐데 ... 왜 그랬을까? (개콘 버전으로, 누가 그랬을까?)

 

여기서 신중히 논리적으로 접근해 보면, 이렇게 된다.
<기억하라>고 한 것이 <알라>라고 해야 할 것의 실수였다면
두 말할 여지가 없으니 논외로 치면 되지만
혹시, 실수가 아니라면 ...?
그래서 이 불편한 경구가 팩트(Fact)라면 ...?

이 경구대로라면 우리는 최소한 한 번 이상 죽어봤어야 한다.

 

그래야 기억할테니...
그리고 또 이 경구는

우리가 죽음을 기억하는 데에 실패했었으리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아마 실패의 주요인은 무지(無知)일 것이다.

그리고 무지는 에고의 주요한 자양분이다.

 

에고는 무지 때문에 자신 만의 영화를 구가하는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고,
무지는 에고의 역량에 비례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일수록 이 '메멘토 모리'라는 경구는

외면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문제는
에고에 춤추는 세상 사람들 중에 누가

'죽음'이라는 불편한 미래를 상기시키는 이 경구를 탐탁하게 여길 것인가?로 모아진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수 천번의 생을
이 '메멘토 모리'와 상관없이 살아왔다 한들

언젠가는 이 '메멘토 모리'라는 단검에 심장을 찔리고야 말 것이다.

 

그리하여 불편함이라는 거적대기를 들추어

비로소 '죽음'의 얼굴을 마주할 것이다.

 

나는 이제, 새삼스레 자신에게 되뇌어 본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이것은 에고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2008. 10.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