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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서 마법으로

툴레의 <Now>를 읽으며 깨달음의 쓰임을 생각하다


요즘 에크하르트 툴레의 <Now>를 읽고 있다.
전에 사뒀다가 손이 가지 않아 제쳐두었는데

지하철 이용시간이 늘어나면서 뭔가 읽을거리를 찾다가 만나게 된 것이다.

 

이제 한 3분의 1을 읽었나 싶은데

반가운 친구 하나 알게 된 흐뭇함에 기분이 좋다.

 

그것은 툴레가 얘기하는 '에고'가

내가 알고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툴레는 '에고'를 누구에게나 있는 '기능장애'로 보고 있다.

그리고 '에고'를 자각하는 일만으로도 '기능장애'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문명은 이 '기능장애'가 쌓아온 역사의 축적물이며
이 '기능장애'가 버젓이 존재하는 한

과학, 철학, 예술 등 그외의 어느 분야이건 광기의 발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좀 과격하게 말을 옮긴 면이 있으나
'에고'를 '기능장애'로 보는 재밌는 발상을 통해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온 역사를 통찰하는 하나의 혜안임은 분명하다.

 

그러고보면 우리가 언급하는 '깨달음'을
현실적인 의미에서 풀어보면

자신의 '에고'에 대한 자각인 지도 모른다.

 

이 <'에고'에 대한 자각>만이
'에고'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광기로 얼룩진 비극을 멈추게 하는 열쇠인 것이다.

 

명상이 필요한 이유도
이 '에고'를 보게 하여

더 이상 '에고'에 휘둘리지 않게 되려 하는 것에 있다.

 

더 읽어봐야겠지만

<NOW>가 제시하는 비전에 십분 공감한다.

 

이것은 엊그제 박석교수가 들려준

'명상의 사회화'와도 일맥상통한다.

 

'깨달음'이 개인에게서 그치는 것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의 '깨달음'이다.

 

이제 그것은 생활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펼쳐지고 드러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비극이 마법이 되는 연금술(깨달음)의 바른 쓰임일 것이다.

 

 

2008.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