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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 우스개에 따르면,
세상엔 시가 없어도 잘 사는 사람과 시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 있다.
시가 사라지고 있다거나 죽어간다며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단연코 시는 사라졌고,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누군가는 시집을 들고 시가 왜 사라졌고 죽었느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단연코 시는 사라졌고 죽었다고 다시 말한다.
시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지 못했다.
사실 시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
시가 살 수 있는 공간은 사람들의 가슴이다.
그런데 어느새 시가 말라죽어 버렸다.
황량한 가슴엔 덤불이 굴러다니고
이따끔 불어오는 바람에 먼지만이 폴폴거릴 뿐
시가 존재했었다는 기억조차 희미해져간다.
시는 다시 부활해야 한다.
시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시가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그것이 시가 다시 살아나야 할 이유다.
영화 시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죽어있는 휑한 가슴을
어떤 먹먹함으로 가득 메운다.
그것이 뭘까?
그것이 뭘까?
그것이 뭐길래... 이리도 가슴이 먹먹할까?
영화를 놓고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삶에 대해서 혹은 죽음에 대해서...
무지에 대해서 혹은 아름다움에 대해서 ...
영화 시에서 시 대신에 그 자리에 신이라는 단어를 갖다 놓아도 되겠다 싶다.
혹은 깨달음이라는 단어도 무방하지 싶다.
영화 시가 칸느에서 각본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말 인물과 사건들이 씨줄과 날줄로 교묘하게 짜였다.
다른 비유들은 그렇다치고 한가지만 들면
같은 학교 남학생들에게 오랜 시간 성폭행을 당해오다
다리 위에서 강물로 투신한 여학생이
지난해 부엉이바위 위에서 몸을 던진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나게 한다.
(내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지 감독이 의도했을지는 의문이다.)
그 성폭행에 여섯명의 남학생이 가담했고
그중에는 주인공 미자의 손자가 있다.
가해자인 손자 종욱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철없는 아이다.
세상이 그렇다.
죄를 지은 자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른다.
또한 가해자 종욱이 주인공과 한 가족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자에게 시는 구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미자는 시를 완성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한다.
세상의 고통을 그 몸과 정신으로 견뎌내기에
예순살의 할머니 미자는 너무 작고 보잘것 없어보이지만
미자는 자신을 구원했다.
그럼으로써 영혼은 위대하고 강함을 증명했다.
인빅터스처럼 ...
2010.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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