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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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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몇 안되는 나의 독서이력에도 불구하고

탐독하다시피 했던 작가 중에 한명이다.

 

<좀머씨 이야기>로 시작해서 <비둘기>,<콘트라베이스>,<깊이에의 강요>,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로 이르기까지

한때 그의 작품에 대한 탐닉이 중독에 가까웠던 적이 있다.

 

<향수> 역시 쥐스킨트 특유의 독특하면서도 해괴한 분위기 때문에라도
단숨에 읽어내려 갔었다.
그런 까닭에 영화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한적한 일상을 충분히 적셔 줄 단비가 되었다.

 

냄새라는 소재가 어떻게 영상화 되었을까라는 직업적인 호기심과
오래 잊고 있던 예전 독서물에 대한 향수가

영화를 보는 또하나의 재미가 되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글읽기보다는 영상에 친숙해져서인지
영화를 다 보고나자 소설에선 감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해석이 떠올랐다.

 

나는 쥐스킨트가 명상을 알고 있는지,
그래서 그 길에서의 오랜 몸부림을 통해 <향수>라는

소설이 나온 것인지에 대해 알 지 못한다.

 

그럴 가능성은 적은 것처럼 보여지지만
삶에 대한 간단없는 관찰과 되새김이

<향수>를 영성과 만나게 했을거란 짐작은 해본다.

 

도판에선 흔히들 향기를 수행의 에센스처럼 여긴다.

영혼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즉, 향기는 깊은 수행의 경지를 증거하는

숨길 수 없는 표식인 것이다.

 

주위에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뿜어내는 향기는
오랜 세월 삶이라는 시장터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낸 꽃봉오리의 결과다.

 

풍진 세상에 기어코 뿌리를 내려야하고
하늘로 줄기를 뻗어올려야 하며
세상을 향해 꽃잎을 열어야

비로소 향기가 뿜어진다.

 

그래서

우주에 향기를 보태는 일이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라!
그러면서도 무엇도 취하지 않고

흩어질 줄 아는 능력까지...

 

영화는 시종 어떤 냄새들을 연상시키는 화면으로 일관했다.

 

그것을 위해 고안된 카메라 앵글과 움직임은
관객 각자가 무의식적으로라도 기억창고에서

냄새에 대한 기억들을 끄집어내도록 부추키는 것이었다.

 

악취가 진동하는 생선쓰레기 더미 위에서 태어난 주인공 그르누이,
나중에 알게되는 사실이지만 그는 자신만의 냄새가 없는 인간이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지만 소설이니까, 영화니까 감수하고 넘어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부분이 용인되지 않으면

<향수>라는 소설은, 영화는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냄새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주인공 그루누이는 영혼이 없는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냄새가 없기 때문에
그는 타고난 냄새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걸로 보인다.
무언가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뛰어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그것을 가지지 않은 만큼 자유롭다는 것을 암시한다.

 

향수 제조가로서의 성공은 애초 그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질 못했다.
수많은 냄새 중에서 어느 앳된 소녀의 냄새는

최고의 냄새였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나는 냄새를 모으기 시작하고
필연적으로 살인이 동반됐다.

아름다운 소녀의 죽음은 끔찍하다.

 

하지만 그가 냄새없이 태어난 인간임을 받아들인 터라
끔찍함을 감수하면서
'그래 좋아, 근데 네가 원하는게 뭔데...?' 하면서

자연스레 주인공의 말로에 귀추가 주목됐다.

 

그루누이는 엄청난 집념으로 인간의 냄새로 만들어진

12개의 원액을 가지고 향수를 만들어 낸다.

 

영화의 압권은 중세의 한 도시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희대의 살인마 그루누이가
성난 군중들 앞에서 사형되기 직전

자신에게 향수를 뿌리고 그 향에 취한 수천의 군중이 집단난교를 하는 장면이다.

 

지극한 분노마저 사그라뜨리고 오히려

살인자에게 홀리게 만드는 냄새는 어떤 냄새일까?

 

그루누이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찾아와

기묘한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한다.

 

시장터 한복판에서 자신의 몸의 향수를 뿌리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군중들은

저마다 그를 가져간다.

 

해체...

 

그루누이가 군중들의 손에 해체가 된다.
애초 향기를 영원히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무지한 군중은 그 아이러니의 한쪽이고

그루누이는 또 다른 한쪽이다.

 

향기가 사라지듯(정확하게는 향기는 사라지는게 아니다. 우주에 흩뿌려진다.)
그루누이도 그렇게 사라진다.

단지 길바닥에 뒹구는 향수병만이 그를 증거한다.

 

영화를 보고나자,
'이 영화는 예수에 관한 영화다.'라는

쓸데없는 비약이 내안에서 꿈틀댔다.

 

악취 중에 가장 심한 악취로 여겨지는 생선 썩는 시궁창에서 태어난 것은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를 연상케 했다.

 

12개의 인간의 냄새를 모으는 것은

예수의 12제자가 연결됐다.

 

그루누이가 모은 12개의 인간의 냄새는

인간의 정수, 영혼이리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해
최대의 가르침인 부활을 알게 해준 예수와

최고의 향기를 가지고 군중에게 천국을 알게 해준 그루누이.

 

여전히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고자 하는

무지의 군중들.

 

그루누이의 살인은

예수가 12제자를 모은 것과 비교된다.

 

혹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살되 죽어야 가능한 것은 아닐까?

 

부활을 통해 죽음은
하나의 설정임을 알게 해 준 예수처럼
그루누이에게 있어
살인은, 죽음은
군중들의 집단무의식이 만들어낸

최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

 

비약은 비약으로 끝나야겠지만
정말로 궁금해지는 것은
도대체 어떤 냄새길래
사람들이 그리도 미칠 수 있는 걸까?
혹시 깨달음이라는게

그렇게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것일까?

 

 

2007/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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