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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서 마법으로

깨달음을 찾는 그대에게3:빛과 소금처럼 되어라


'깨그' 최종편을 올린다.

지난 글에서 산에 오르는 일을 비유로 들어 '깨달음'을 들여다보았는데

그런 비유가 '깨달음'의 일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많이 부족한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 부족함을 메꿀려고 글을 올리고 난뒤 최종편을 예고했는데

그 최종편을 오늘에서야 올리는 것이다.

 

조금 더 고백하자면,

'깨그' 최종편의 초고는 예고한 다음날 완성되었더랬다.

그런데 이 녀석을 올릴려면 제일 밑에 '등록'이라는 버튼을 클릭하면 되는데

몇 번이나 들여다봐도 마음에 들지 않아 종내 올리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되었나?'하고 돌이켜봤다. 

무턱대고 덤벼든 탓이 가장 컸고

그러다보니 서둘러 최종편을 완성하자는 부담감이 작용했다.

그리고 그 부담감은 '깨달음'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깨그' 최종편에 마구잡이로 구겨넣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글이 당연히 마음에 들리 없었다.

또, '최종편'이라는 라벨 역시 부담감, 초조함의 반영이기도 했다.

 

 

'깨그2'에서 공짜가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깨달음'이 그 '깨달음의 수준'이 어떠한가와는 상관없이

'어떤 것'을 아는 '수고'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이 '수고'가 '깨달음'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시 '산을 오르는 일'에 비유했던 지점으로 돌아가 보자.

 

'깨달음'을 '산을 오르는 일'에 비유했을 때 가장 유익한 것은

산을 오를수록 멀리 볼 수 있는 것처럼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멀리 볼 수 있게 되고, 그만큼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며 

그것은 종국에는 통찰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이 비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더 제시해야 그나마

'깨달음'의 꼬투리를 잡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면

'깨달음'을 '산을 오르는 일'에 비유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지나친 노파심의 발로일지는 몰라도,

이런 경우 분명 '산을 오르는 일'만을 '깨달음'의 전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만으로도 '깨달음'의 꼬투리를 그러쥘 수 있다면

그것은 운이 좋은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지, 그것이 이 비유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깨달음'은 '산을 오르는 일'만이 아니라

'내려가는 일'로도 많은 비유가 가능하다.

 

그만큼 '깨달음'의 실체는 오리무중인 것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아마 이것이 무턱대고 '깨달음'에 대해 논했다가

오랜 시간을 침묵하게 된 주요한 까닭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마치 '신'의 발톱을 보았다는 자부심만으로

'신'을 정의할 수 있다고 호기를 부린거에 해당한다.

 

 

'산을 오르는 일'만큼 '산을 내려가는 일'로도

'깨달음'의 여러 측면을 얘기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산을 오르는 일'이나 '산을 내려가는 일'에 어떤 의미부여를 해서 

'깨달음'을 이해하는 것보다

'깨달음'의 실체로 곧장 들어가는 것이다.

 

즉, '깨달음'은

올라가면 올라갈 때의 자신을 지켜보는 것이며

내려가면 내려갈 때의 자신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 '지켜봄'이 '깨어있음'이고

지켜봄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누구나 산을 오를 수 있고

산을 오르면 다시 내려오겠지만

산을 오르며 혹은 내려오며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이 '수고'인 것이고

그런 까닭에 '공짜는 없다'는 것이다.

 

'앎'은 두 가지가 있다.

'앎'과 '부스러기 앎'이 그것이다.

 

앞의 '앎'이 '깨달음'의 수준과 상관없이

깨달을 때마다 수반되는 '앎'이라면

뒤의 '앎'은 자신이 알고 있다는 착각속에서 알고 있는 '앎'이다.

 

보통 자신을 지켜보게 되면서부터 후자의 '앎'이 자연스레

전자의 '앎'으로 바뀌긴 한다.

 

그러나 이 후자의 '앎'은 워낙 고질적이어서

자신의 '앎'이 후자였다는 것을 알게된 후에도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이 떨어지는 데에

여러 수준의 슬픔이나 충격 등이 동원되기도 한다.

 

많은 경우의 '절치부심'이나 '회한', '자책' 등등이

자신의 '앎'이 후자였다는 것을 알게 해줄 기회로 제공될 때가 있다.

 

이 후자의 '앎'은 쉽게 얘기해서 '무지'다.

 

'깨달음'을 이야기할 때의 '앎'은

'자신이 몰랐었다'는 이 '무지'에 대한 직시와 수용 이후의 '앎'이다.

 

신탁에 의해 그리스에서 가장 뛰어난 현자라고 지목이 되었던

소크라테스가 명확히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던 것이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는데,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

 

 

'깨달음'을 찾는 그대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산 꼭대기를 향해 오른다.

 

또 산을 오르는 자신을 지켜봄으로써

매순간 변화하는 '마음'이며 '몸'을 안다.

 

이제 그대는 무언가를 알게 됐다.

 

...

...

 

그런데, 그대가 알게 된 것은 진실인가?

 

 

그대가 알게 된 것은 그대의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사실이 진실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의 진실'이다.

 

'그대의 진실'이 다른 이에게도 혹은 모든 이게도

진실인 것은 아닌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적은 모든 불경의 처음은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라는 뜻의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한다.

 

무언가가 말해졌고 '나'는 그것을 들었다.

그러나 '말해진 것'과 '들은 것' 사이에 '내(我)가'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것이 붓다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들은 '나'라는 변수를 참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위에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안' 이후에

자신의 '몸'과 '마음' 혹은 그 밖의 것들을 알게 되는 그대가

'질투'라는 감정에 휩싸여 있다.

 

이때 '질투하고 있는 나'가 알고 있는 '앎'은 어떨까?

그것이 다른 이에게도 진실일 수 있을까?

 

물론 질투의 와중에 알게 된 것이라 해서

그 '앎'이 '앎'이 아닌 것이 아니며

그대에게마저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의 '자신의 진실'이 '모두'에게 '진실'인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자신의 진실', '나의 진실'이 보편성을 띠어

모두에게 '진실'일 수는 없는 걸까?

 

...

...

 

왜 없겠는가? 힘들어서 그렇지...

그래서 '깨달음'을 찾는 것 아닌가?

 

 

 

'나'가 사라지면 된다.

'나'가 사라져서 투명하게 될 때 ...

'나의 진실'은 그냥 '진실'이 되는 것이다.

 

'소금과 빛'의 비유가 완벽히 이것을 의미한다.

붓다의 '무아(無我)'가 이것이다.

 

그대가 소금처럼 녹아서 자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사라졌을때

빛처럼 어둠과 섞여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을때

비로소 '나의 진실'은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때의 아이러니는 이러한 변형의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자신'인 것처럼 이 경우에도 '자신'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것이 붙들므로써 붙들리는

놓치 못해서 붙들리는 아이러니다.

 

 

다시 산에 오르는 비유로 돌아가서

이제 산 꼭대기에 누가 올랐다.

 

그러나 산을 오른 이가

'빛과 소금'처럼 되었다면

산 꼭대기의 누군가는 있으면서 없다.

 

이제 그 누군가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면

이 '누구'가 사라진 '앎'이 '깨달음'이다.

 

'아는 사람'은 없다.

'앎'만이 있다.

더 정확하게는 '깨어서 지켜보는 앎'이다.

 

그러니 '앎'만이 있게 하라.

 

...

...

 

 

그러면 그대는 이제 무엇을 찾아야 하나...?

 

 

그렇지, 그렇지...

 

그대는 없지...

아니 모든 곳에 있지...


2009.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