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깨달음'을
자신을 놓아주어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깨달음'에 대한 견해야말로 사람마다 제 각각이어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이긴 하다.
그러니 이 글을 심각하게 읽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다.
그리고 이 글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이 모두
'꼭 그렇진 않을 수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오늘은 각각의 정의에 따라 백인백색인 '깨달음'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깨달음'의 과정을 가장 상징적으로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산을 오르는 일'이 아닐까하고 여긴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산의 정상을 향하여 한걸음 두걸음 뚜벅뚜벅 내딛는 일이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는 모습과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산의 정상은 대부분 바라볼 수 있는데 반해
깨달음의 고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정도 ...?
그러고보면 깨달음의 고지가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의미가 있긴 하다.
꾸준히 정진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그곳에 당도해 있는 재미가 있을 테니...
깨달음의 산-그냥 산이 아니다-을 오르는 사람들,
그들은 나름의 절박한 연유로 산행을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산행을 하는 이들 중에는 그렇게 절박하지는 않은데 어쩌다가
길을 든 사람도 있을 게다.
이렇게 어쩌다가 산행을 시작한 사람들이 산의 정상에 서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데에
(깨달음의) 산을 찾는 일이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온 사람들이다.
이런 분들은 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산의 기운을 쐬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굳이 정상에 오를 필요를 느낄 일이 없는 것이다.
또 그중에 어떤 이들은
누가 산의 정상을 다녀왔는지 확인하기 어려움에도
산의 정상을 다녀왔던 사람을 만나고픈 바램으로
산 아래서 서성거린다.
어떤 이유로든 이렇게 산 아래 동네는
이런 저런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나마 이들은 깨달음이라는 산의 필요성을 인식한 사람들이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산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잘(?) 살고 있다.
('잘' 다음에 물음표를 단 것은 실제 잘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사는 분들도 있지만
자신이 잘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열심히 잘 사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깨달음의 산이
잘 사는데에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정의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사람들은
깨달음의 산 정상에 서고자 하는 것일까?
왜...?
답은 간단하다.
그곳에 서고 싶으니까... ㅎㅎ
각설하고,
살아가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다면 굳이 깨달음이 필요없을 것이다.
붓다께서 삶은 고통이라고 했을 때,
이 일갈로만 미루어보더라도 삶 자체가 깨달음을 찾을 이유가 된다.
그러니 살아가는 데에 어떤 지장이 생긴 이들 중에는
그 지장의 연원, 종래에는 그 지장의 완전한 소멸이 필요해지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깨달음의 고지 위에 선다는 것이
고통 그 자체인 삶에서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고보면 산을 찾는 이들은 잘 살지 못하는 이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그것이 흉은 아니다.
이미 붓다께서 삶이 고통이라 하셨으니
그 고통을 인식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겠다.
아니 축복까지는 아니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많은 이들이 깨달음의 산 아래 모여든다.
각자 자신 만의 이유로 산을 찾긴 했는데, 산의 정상을 오르기란 여간 만만치 않다.
그만큼 산의 정상을 오르는데 성공한 이는 드물고
때문에, 갖은 소문이 난무하는 곳이 산 아래 동네이기도 하다.
이렇게 산을 찾은 사람들은 피라미드형을 이룬다.
당연히 산 아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의 분포는 희박해진다.
그렇게해서 피라미드의 꼭지점에는 그리 많지 않은 몇몇만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지 않다고...?
수백명의 붓다가 그곳에서 서성거린다고...?
그렇다면, 그것은 "올레!!"할 일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이제 산을 오르는 일과 깨달음의 과정이 어떻게 닮았는지를
본격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헉, 그러면 지금까지는 다 썰이었다는 얘기?)
아시다시피 산을 올라 시야가 넓어져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은
깨달음의 일면을 상징하는 아주 기초적인 것이다.
산을 오를수록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깨달을수록 멀리 바라볼 수 있다.
마치 바둑의 고수가 되면 더 많은 수읽기가 가능한 것도 비슷한 경우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둘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있긴 하다.
산을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은 숲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반면에 깨달음은 숲을 보면서도 숲 안에서 나무를 보는 것이다.
일단 이 차이를 기억하도록 하자.
다음은 산을 오르는 일은 순전히 혼자라는 것이다.
물론 여럿이 모여 오르거나 누군가에게 등 떼밀려 오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들은 어떤 식으로든 혼자의 의미가 퇴색된다.
여럿이 모여 오르더라도 누군가가 자신의 발걸음을 대신하는 데에는 역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럿이 같이 오르는 사람들을 도반이라 칭할 수가 있겠다.
사실 도반이라 하면 굉장한 인연이다.
산의 존재유무에 대한 인식없이도 잘 살았다면 만날 일이 없었을 텐데
나름의 어려움들을 물리치고 깨달음의 고지를 향해 같은 걸음을 하게 됐다는 것은
엄청난 인연인 것이다.
그러나 인연은 인연이고 산을 오르는 것은 누구도 해줄수 없는 자신만의 일이다.
내가 올랐다고 다른 도반이 오른 것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뭐 궁극적으로 너와 내가 따로 없다는 식으로,
'네가 오른 게 내가 오른 것이다.'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런 이유를 댈라치면
'붓다같은 분이 계셨는데 굳이 내가 오를 일은 뭐야?'까지 나올 것이다.
그런 분은 그렇게 사시면 된다.
그렇게 사는 것도 순전히 자신만의 일이다.
이렇든 저렇든 깨달음 역시 마찬가지다.
순전히 자신만의 일이다.
또 하나가 산을 오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상한 고집을 부리곤 한다.
산을 오르는 데에 가장 적합하게 여겨진, 자신이 선택한 길에
자부심을 갖는 것을 뭐라 할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좀 멋적은 일이다.
물론 자신에게 보다 적합한 길이 있다.
다른 이가 오솔길을 택할 때, 자신은 바윗길을 택한다든지 하는 ...
그렇더라도 그것은 각자의 취향과 선택이지
영원히 어느 길이 더 나은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이런 식의 올(all) 오어(or) 낫씽(nothing)인데
요즘은 불교에 심취한 분들에게서도 이런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한다.
이런 것을 균형감이라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 그렇기도 하거니와
조금 깨달았다고 해서 자칫 독단으로 흐르기 쉬운
에고의 수작을 경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가
산을 오르는 일을 그만두는 것도 언제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강제될 수도 강제되어서도 안될 일이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 굳이 언급할 필요까지 있겠느냐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이것은 진리라 여겨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타인에게 어느 정도까지 제시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이것은 도판에서도 미묘하게 작용한다.
나 역시 이 유혹에 여러번 빠져도 보았고
여전히 매순간 이 유혹의 덫을 들락거리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제 그 모든 어려움을 뚫고 산 정상에 오른 이야기를 해 본다.
굳이 깨달음의 산이 아니어도 산의 정상에 선 기분은
좀 속되지만 '째진다'라는 표현이 제대로이지 싶다.
이제 정상에 오른 어떤 이가 있다.
이 어떤 이가 정상에 올라 제일 먼저 발견하는 현상은
시야가 탁 트이는 것이다.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는 물리적인 공간들이 시야를 막아
멀리 바라보는 게 힘들었지만
정상에서는 시야를 막아서던 물리적인 것들이 치워진 것이다.
깨달음 역시 시야가 트인다는 점에서 산의 정상에 선 것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산에 오르는 일이
눈 앞에 있는 물리적인 것들을 지나치는 -산을 오를 때 가리던 것들이 치워지는 효과가 나니까
'물리적인 것들을 치워버리는'이라는 표현이 더 낫지 싶기도 하다- 그렇게 자신이 올라서
시야가 트이게 되는 것이라면
깨닫는다는 것은 자신이 치워져 시야가 트이는 것이다.
이 자신이 치워져야 한다는 것이 이전 글에서 언급한
자신을 놓아주는 것 같은 것이다.
그렇게 산 정상에 올라 멀리까지 볼 수 있게 된 이는
곧 실제적인 선택에 직면한다.
뭇사람들과 떨어진 그 산 정상에서 계속 살 것인지
아니면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 뭇사람들과 같이 살 것인지 ...
그가 산 정상에서 얻은 것은 (정상에선 전체라고 여겨지는, 사실 그조차도 전체가 아닐 수도 있지만)
멀리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설왕설래할 뿐 알지 못했는데
산 정상에 선 사람은 그가 볼 수 있는 한, 무엇을 보았다고는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정상에 선 이의 내면에 일어난 변화다.
이제 그의 내면에서는 정상에 서고자 하는 갈애가 사라졌다.
두번 세번 다시 정상에 오를 순 있어도
정상에 오르고자 하는 욕구가 이전과는 같을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물론 또다른 정상(그게 더높은 정상이든, 아니면 산 아래 동네 저잣거리든)을 향하려는
욕구가 생길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처음의 욕구는 아니다.
비워졌던 그의 내면에 욕구가 있다 하더라도
이제 그것은 욕구이면서 욕구가 아닌 것이 된다.
산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지 않는 선택을 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내려오지 않는 선택은 산 아래로 내려오는 선택만큼 충분히 가치가 있다.
어쨌거나 어떤 선택이든 그것은 그의 것이니까...
그러면 산 정상에 올랐다가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온 이의 경우는 어떨까?
일상으로 돌아온 그는 산 정상에 올랐던 기억을 갖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상의 삶이 이전의 패턴과는 질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 질적인 것은 이면에 숨어있기에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는다.
종국엔 그 질적인 것들도 그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이제 그는 그 질적인 것들도 필요하지 않게 된다.
정상에 올랐던 기억은 세월에 묻히고
종국에 그는 다른 사람들과 거의 완벽하게 다르지 않게 된다.
한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의 안에 그가 없이 살 수 있게 됐다는 거 정도 ...?
비극이 마법이 될 수 있는 까닭이
그 안의 비극을 감당할 그가 사라졌다는 거 ...?
그런데 혼동하지 마시라...
그렇다고해서 비극이 비극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이제 비극은
더 처절한 비극이다.
그런데 그러면서 비극이 비극이 아니다.
그의 내면에서 그가 사라졌기에 ...
그런데 그거 별거 아니다.
굳이 산을 오르겠다면 말리진 않으나
그렇다고 굳이 다른 거 할게 없다면
산을 오르는 것도 나쁘진 않다.
물론 공짜는 없다.
2009.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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