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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서 마법으로

뒤틀린 자화상, '보상 심리' 그리고 그놈의 '정' 때문에


그놈의 정情 때문에 ......

미운 정情 고운 정情 다 들어서 ......

정情 떨어졌어 ......

정情에 울고 웃고 ......

 

 

잘 살펴보면, 우리의 마음 씀씀이는 모두

그 '정'의 행방에 좌우된다.

 

'정'은 우리의 집단무의식 저변에

두텁게 깔려 있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매정하다'는 평가를 듣는 것을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해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암묵적인 동의와 공감, 유대는

집단무의식 깊이 뿌리 박혔다.

 

이 집단무의식 깊숙이 박혀있는 '정'이라는 심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이 '정'이라는 거미줄이

드리워져 있다.

사람들은 가끔씩 이 거미줄을 인식하고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정'이 함유하고 있는 뭐라 하기에 참 거시기한 어떤 것 때문에

그런 불편함은 이내 묻히곤 한다.

 

때때로 '속정이 깊다'...라는 한마디는

어떨땐 최고의 칭찬이 되기도 한다.

  

그럴때마다 '정'은 우리가 꼭 지녀야 할

사람의 도리라고 여겨진다.

그러는 순간에도 이것은 계속해서 집단무의식에 더욱 뿌리를 내리고 ......

 

 

 

우리는 이 '정'을 처음 준 상대에게

그것을 쉽사리 걷어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의 우리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한다.

 

 

일례로,

우리 부모님이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민자당, 한나라당을 잇는

정치 지도자와 세력에게 쏟는 애정 같은 것이다.

 

사실 그것을 애정이라 지칭하기엔 뭣하고 그냥 '묻지마 지지'라고 하는 것이 더 낫겠다.

어찌됐든 밝혀진 과오만으로도 그들을 지지하기엔

거시기할텐데도

그들에 대한 지지는 향수로 남아있다.

 

반면에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그 심리-첫정-에 희생되신 분들이다.

 

왜냐하면 두 대통령은 괜히 정이 안 갔던 것이다.

 

전자의 밝혀진 과오와 이 두 분의 치적에도 불구하고

두 대통령은 나이 드신 분들의 무의식에 광범위하게 깔려있는

반감에 희생된 것이다.

 

신기한 것이

나이 든 분들은 모든 팩트가 제시되어서 그 반감을 희석한다 해도

"다 똑같아. 그 놈이 그 놈이야." 같은 말로

첫 정을 준 이들에 대한 심정적 지지를 거두지 않는다.

 

이것이 '보상 심리'이다.

이 '보상 심리'는 '정'이 그런 것처럼 아주 끈적끈적하고 질펀한대다가

마음의 구조적, 원초적 본성 같은 것이다.

 

마음이 처음 어떤 것에 애정을 쏟았다면

마음은 이 쏟은 탄력을 웬만해선 바꿀려고 하지 않는다.

또 바꾸기도 쉽지 않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 늘상 일어난다.

 

가장 많은 곳이 내면 세계를 다루는

종교 분야와 도판이다.

 

뭐 굳이 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을 듯 하다.

 

아마 많은 분들이 '보상 심리'만 이해해도

그동안 고개가 갸웃거려지던

많은 일들이 수긍되어질 것이다.

 

 

그럼, 이 '보상 심리'를 어떻게 하면

치유할 수 있을까?

 

 

 

글쎄요...

 
2009.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