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품었던 의문이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읽고 명확해졌다.
설마 했고 어느 정도 짐작은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부패공화국이요, 삼성공화국이나 다름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책에서 소개된 삼성의 각종 불법과 탈법들에 대해 심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가?
법치를 강조하는 대통령이 포괄적 뇌물죄로 전직 대통령을 벼랑으로 내몰고
전직 총리를 파렴치한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언론을 가진 나라 아닌가?
그런데 왜 대한민국은 삼성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기만 할까?
오래 품었던 그 의문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거라 유래가 깊다.
곤궁했던 어린 시절 나는 한 가지 의문을 품었더랬는데 그것은 ‘왜 착한 사람들은 잘 살지 못할까?’였다.
물론 그 의문은 한동안 잊혀졌고 근래에야 풀렸다.
의문의 초기 시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문구가 있었다.
신문광고에서 본 책 제목이었던 거 같은데 ‘잘 사는 것이 최대의 복수다.’
왜 복수해야 하는지, 누구에게 복수해야 하는지는 불분명했지만 ‘잘 사는 것이 최대의 복수’라는 개념은
어린 아이가 가졌던 세상에 대한 희미한 적개심을 적절하게 표현한 문구였다.
아마 아이는 그 시절 어렴풋이나마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으리라.
당시 소년의 아버지는 혀를 둥글게 말아 침방울을 허공으로 날리곤 했다.
소년에게 그것은 무료함의 극치로 보였고 가난한 자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오락으로 보였다.
방바닥에서 누워 아버지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소년은 침으로 고여가는 방바닥을 바라보며
그 시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아버지와 소년을 짓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어쩌면 소년은 살아가면서 다시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할 지도 몰랐다.
거기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러나 소년은 아련한 슬픔을 느꼈다.
시간이 흘러서 소년은 어른이 되었고 소년은 이제 세상이 정의롭지 만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또 알량한 양심이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함을 인정해야 했다.
아, 도움은 커녕 그것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덜렁거리는 양심은 아마 머지않아 인간에게 퇴화되어 사라진 꼬리처럼 될 것이다.
그래서 먼훗날 인류는 문헌으로 인간에게 양심이란게 있었음을 알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 모든 걸 인정하더라도 이것은 분명 소년에겐 비극이었다.
그러면 비극은 언제까지나 비극이어야 할까?
세상은 정말 소년이 인정한대로 실종된 정의를 찾아낼 가능성은 없는가?
![]() In Darkness |
소년은 꿈꿀 수 없는 것을 꿈꾸는가?
다행이다. 소년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어떤 실마리를 찾았다.
소년은 그것을 “비극에서 마법으로”라고 부르기로 했다.
소년이 세상이 정의롭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소년은 실마리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또 소년이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 대해 분노하지 않았더라면 실마리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살면서 많은 시련을 겪는다. 그리고 그 시련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직면한다.
사람은 이 시련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항하고 투쟁을 통해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다.
사람이 시련에 저항해서 항상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사실 사람에겐 어떠한 시련을 만나더라도 쉽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항상 존재한다.
단지 그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을 뿐이다. 그것은 양심을 파는 일이다. 양심이 얼마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실 시련은 양심을 팔라는 유혹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만일 초기에 양심을 팔지 않았다면 사람은 갈수록 혹독한 시련을 만나게 된다.
그만큼 양심은 오랜 시련에 누더기가 되어 있는데다가 당연히 시간이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은 단순히 지쳤다는 이유만으로도 언제든 양심을 팔 준비를 갖추기도 한다.
양심을 팔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혹독한 시련은 세상이 정의롭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아직도 양심을 못 팔고 있는 사람이라면 주위로부터는 어리석다는 핀잔을 듣는다.
소년이 돌아보니 세상은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사람들이 양심을 팔지 않아도 되기 위해선 충분한 수의 사람이 혹독한 시련과 유혹을 넘어서야 하는데
소년이 보기에 이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 아니 불가능 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지도 모르겠다.
너무 늦었을 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고 있지만, 소년에겐 한 가닥 희망이 있다.
아무리 불가능하다고 해도 꿈까지 꾸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에,
소년은 사람이 양심을 팔지 않아도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또 소년이 믿고 있는 구석은 세상이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것이다.
마치 밤이 깊으면 새벽이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소년은 머지않아 이 세상에도 다시 정의의 싹이 돋아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소년이 믿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양심을 팔아서 잘 살고 있다 해도 자신이 양심을 판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만일 어떤 계기로 그들에게 용기가 주어진다면
대대적인 양심 환수 조치가 취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도마복음 7절의 비유에 의하면, 양심을 판 사람들은 사자에게 먹힌 사람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아주 단순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사자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람에게 화가 있다. ”
이 화가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다.
예수는 ‘화’가 있는 까닭을 알려주셨다.
“그 사자도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와 함께 있다.
사람에게 ‘화’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양심은 주로 돈과 권력에 팔린다.
혹자는 살기 위해 양심을 팔았다고 할 것이다.
어쩌면 혹자가 아니라 양심을 판 거의 대부분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불가피했었다고 할 것이다.
아무리 자기합리화라 하더라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양심이 목숨보다 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세상은 영원히 ‘화’로 가득할 것이다.
또 양심을 팔지 않았으니 자신은 사자에게 먹히진 않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경우는 단순히 먹히지 않고 있을 뿐이다.
사자를 잡아 먹지 않는 한 언젠간 잡아 먹힐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답을 주셨다.
“사람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자는 복이 있다.”
그렇다.
사람이 사자에게 먹히지 않고 사자를 잡아먹으면 된다. 그러면 ‘복’이 있다.
사자에게 먹힌 사람은 사람 행세를 하는 맹수다.
그런 까닭에 그들을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먼저 혼자만 잘 살려고 하는 사람은 100% 사자에게 먹힌 사람이다.
그들은 함께 잘 사는 방법을 모른다. 그렇기에 그들은 민주주의가 불편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할 줄 모른다.
그들에게 다른 사람은 자신의 부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고작해야 그들은 함께 살기 위해 자신들이 선심을 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자감세는 그들이 선심을 쓸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혹독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사람보다 자신의 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실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언론을 장악해야 하는 까닭이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지혜로와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사람들이 지혜로와지면 세상이 돈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일은 쉽다. 그냥 있으면 된다.
사자에게 물릴 때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먹히고 사자 뱃속에 들어가면 오히려 편안해 진다.
이제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사자를 잡아먹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어려운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사자에게 먹힌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것이 세상이 비극인 까닭이다.
‘가만있어도 세상은 그냥 굴러갈 텐데 그리고
굳이 내가 나서도 세상이 바뀌지도 않을 걸 위험한 일을 자청할 까닭이 무엇인가?’
사자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여기엔 위험한 자기합리화가 숨어 있다.
이런 자기합리화의 최종 정차역은 죽음이다.
뭐, 죽음을 환영하거나 최소한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말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모두 죽자.’라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전개한다면 사실 아무 할 말이 없는 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고’ 특히 파멸을 부르는 ‘에고’가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소설 ‘승자는 혼자다’에서 아주 적절한 비유를 들고 있다.
...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실 건데요?"
"두꺼비에 대해 좀 아나?"
"두꺼비요?"
"생물학에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두꺼비 한 마리를 살고 있던 호수의 물과 함께 용기에 넣어 불을 지피면
꼼짝 않고 그 안에 머문다더군.
녀석은 온도가 점차 올라가는 것, 즉 외부환경의 변화에 반응하지 않는 거지.
그러다가 마침내 물이 끓으면 몸이 삶아져 퉁퉁 부풀어 오르지만 행복하게 죽는 거야.
그런데 물이 끓고 있는 용기에 두꺼비를 넣으면 즉시 튀어나와.
화상은 좀 입을지 몰라도 살아 있는 상태로 말이야."
두꺼비 이야기와 세계의 파괴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올리비아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고르는 말을 이었다.
"나도 두꺼비처럼 군 적이 있었어. 나 역시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지.
그저 이렇게 생각했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나쁜 일들은 지나가버릴 거야.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난 곧 죽을 운명이었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으니까.
그렇게, 일 분 일 초가 지날 때마다 점점 더 뜨거워지는 물속에서 무기력하게 둥 둥 떠다녔을 뿐이야."
"... 어떤 두꺼비들은 몸이 익어가면서도 계속 이렇게 생각하지.
중요한 건 능력이 아니라 상황에 순종하는 거라고.
능력 있는 자들은 명령하지만, 현명한 자는 순종하는 법이지, 라고...
이런 태도에 무슨 진실이 있겠어?
비록 화상을 입었더라도 아직 살아 있을 때, 아직 행동할 수 있을 때 끓는 물에서 뛰쳐나와야 하는 거야..."
(41-42p.)
......
이런 자기합리화는 사자에게 잡아먹힌 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흔한 마인드이다.
이제 세상은 이 자기합리화라는 기준에 의해 해석되고 사자에게 잡아먹힌 이는 이 해석을 근거로 살아간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이지만, 이런 삶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단지 ‘화’일 뿐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자신의 삶이 ‘화’인지, ‘복’인지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된 후의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그것이 ‘화’든 ‘복’이든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치유의 길은 없는가? : 비극에서 마법으로
그러면 사자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방법은 없는가?
당연히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것으로 그 첫걸음을 떼었다.
삶에 대한 의문을 품고 그 실마리를 찾으려 노력한 자체가 시작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자에게 잡아먹히면 ‘화’가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 사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의 ‘사자’가 단순히 동물을 뜻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먹느냐, 먹히느냐?
사람과 사자가 먹고 먹히는 이 절체절명의 사투는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치유의 단초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이 ‘사자’가 무엇인지를 아는데 있다.
소년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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