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2009년 5월에 썼던 글인데 포스팅을 하지 않은 채
임시저장이 되었었다.
예전 도론도담 게시판에서 불심 깊은 회원들과 의견을 나누다 적었던 기억이 있다.
새 글을 적을 마음의 여유도 없고 해서 잠깐 들어와봤다가
이 옛날 글을 포스팅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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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불자가 아니더라도 '삶은 괴로움이다.'라는 붓다의 설파를 부인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그런데 '삶은 괴로움이다.'라는 이 가르침은 자칫 오도되어
많은 이들을 방황과 방랑의 나락으로 빠지게도 할 수 있는 무서운 가르침이다.
'삶은 괴로움이다.'라는 이 일갈을 아무 의심없이 무턱대고 받아들이면
이 가르침은 두고두고 불자의 무의식 속에 뿌리를 내리고
이 가르침의 위대함을 증명해주는 현실을 체험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노파심이라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분들이 많을 줄로 안다.
그러면 다행이다.
그런데 붓다께선 많고 많은 표현 중에 하필 '삶은 괴로움이다.'라는 가르침을 주셨을까?
사성제 중에 일체개고가 있다.
이것은 요즘 한창 잘 나가는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라는 광고를 연상케 하는데
어떤 면에선 그 광고가 표현이 좀 거시기해서 그렇지
맞는 말이긴 할 것이다.
일체가 분리되지 않는 하나라고 하면
그 일체는 한시도 집을 나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집을 나갈 수 없는 이 일체가 '개고생'(괴로움)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럼 개고생은 누가 하는 것인가?
집을 나갔다고 생각하는 '내'가 하는 것이다.
한시도 집을 나갈 수는 없는데
집을 나가서 개고생...?
이걸 잘 뜯어보면 결국엔
궁극의 실체로서의 이 일체는 한시도 집을 떠나지 않으면서
집을 나갔다는 생각만으로도 개고생을 체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야(maya)인 것이다.
이것을 다시 풀면
'삶은 괴로움이다.'에 '삶은 마야다.'라는 것이 딸려 나온다.
'삶은 괴로움이다.'는 붓다의 방편이다.
그것은 '삶'을 괴로움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데 필요한 첫걸음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봐, 괴롭지...?
그래. 그래.
세상은 힘들고 괴로운 거야.
근데 내가 알려주는 이것을 잘 따르면
괴로움을 여읠 수가 있을거야.
어때, 한번 해보지 않으련...?'
이렇게 말이다.
근데 이 가르침이 방편으로 이해되지 않고
어떤 진리로 뇌리에 새겨진다면 이것은 무의식에까지 깊숙이 자리한 다음에
현실이 이것을 경험케 하는 것으로
붓다의 위대함을 실감하게 하는 매트릭스처럼 작용할 것이란 것이다.
뗏목으로 강을 건넌 뒤
뗏목을 이고가는 이들이 있다.
'살불살조'가 이것을 뜻한다.
그래서 문제는 '삶은 괴로움이다.'라는 가르침을 준 이 붓다를 누가
죽이고 넘어갈 수 있느냐?
누가 무리에서 나와 울타리를 나간 한 마리 양이 되느냐?라는 것이다.
2010.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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