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말 시작된 촬영의 결과가 엊그제 금요일 밤에 EBS를 통해
방송되면서 한시름 놓게 되었다.
프로그램 연출을 오랫동안 해왔어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방송으로 밥벌이 하는 자에겐 숙명같은 것이다.
이번 작업은 일정에 쫓기는 와중에도 촬영 마무리를 위해
두번이나 대구를 방문해야 했다.
날씨는 살인적이었고(실제 무더위에 죽었다 살아났다)
주말의 편집은 에어콘도 없이 밤을 나는 강행군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방송은 하게 됐고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비몽사몽으로 깨어난 아침, 일어나기도 뭣하고 더 자기도 뭣한 상황에서
온라인 바둑을 열었더니 누군가 기다렸다는듯 대국신청을 한다.
온라인 바둑은 돈도 안들고
두어봤자 제한시간 5분 이내의 대국으로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는 심심풀이로는 제격인 게임이기에
즐겨 찾고 있는 편이다.
바둑이 시작되고 예의 속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몇 수 두었을까?
아래 기보의 수순 76에서 진행은 급속도로 늦어졌다.
그제서야 제한시간을 보니 무려 16시간 이상의 제한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아, 제한시간이 무슨 상관이야?' 싶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서로 장고할 일도 없을 테고 바둑 내용도
조금 더 두면 끝날 성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었다.
76수에 이은 77이 두어지는데 무려 1시간이 흐른 것이다.
물론 그 시간에 밥도 먹고 TV도 보며 틈틈히 바둑판을 들여다봤지만
그러면서 상황 판단을 해보니 조금 지나치다 싶었다.
상대방은 제한시간 16시간을 다 쓸 기세다 싶은 것이었다.
그때가 아침 나절이었으니 내가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상대방 시간만
계산해도 다음날 새벽 4시경이 되어야 끝난다는 계산이 나왔다.
77에 이어 79수도 거의 1시간을 쓰고 있었다.
상대방의 대국정보를 체크해보니 현 급수에서의 승률은 63승 60패 ...
비교적 나쁘지 않은 전적인걸 보면 실력이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속기로 잘 두다가 자신의 형세가 불리하니 착점을 한없이 늦추는 것은
참 해괴한 행태였다.
여하튼 사태가 확산되고 있었다.
투닥투닥 두어서 이기면 이겼네, 지면 졌군 하면 될 것을
그냥 접을 수 없는 심각한 지경이 돼 버린 것이다.
79수에 이어 내가 둘 차례인 80수에서 장고를 해봤다.
한 20분을 흘리고 80번째 수를 둔 것이다.
이런 때 상대방은 무엇을 할까 짐작을 해 봤다.
바둑판을 들여다보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일을 하고 있을까 싶은 것이었다.
그랬더니 기다리고 있었는지 이후 수순이 좀 더 진행되었다.
그게 96까지 축이 성립 안되는 것을 확인하는 수순이다.
축이 안되는데도 축몰이를 했으면 이후는 거의 수습 불가나 다름없다.
이창호나 이세돌이 두면 모를까 ...
축몰이를 서로 확인하고 축이 안됐다.
이런 경우 상대방은 투항을 하는게 보통이다.
그게 바둑을 아는 사람들의 합리적인 혹은 상식적인 예의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대국의 상대방은 기권 같은 의사표시는 잊었는지
또다시 시간을 흘려 보냈다.
이번 대국을 시작하고 아침을 먹었는데
어느새 그女가 점심으로 콩국수를 내오고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라도 바둑을 닫으면 오히려 내쪽에서 기권패가 되어서
컴을 열어둔 채 식사를 했고 또 중간에 인터넷 연결이 끊겨
다시 접속을 해야 했다.
(인터넷이 끊겨 5분 이내 접속을 못하면 접속 못한 쪽이 패배한 걸로 결론이 나는 게
온라인 바둑의 룰이다.)
그女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서둘러 접속을 해서 둔 게 99에서 110까지의 진행이었다.
잘 보니 110 같은 수는 헛손질인데 속기로 두다보니 실수가 나온 것이다.
이 무렵이 오후 5시가 넘어서였다.
그女가 외출을 하자고 해서 컴을 끄지 않은 채 외출을 해서 다른 곳에서 온라인 바둑으로
접속을 했다.(외출을 한 사이 무슨 일로 인터넷이 끊기고 5분 이내로 접속을 못하면
바둑을 지기 때문에 이 때 상당히 초조했다.)
그랬더니 온라인 바둑 사이트에서 이전 ID의 접속을 끊고 새로 접속하겠느냐고 물어온다.
그래서 그렇게 했더니 상대방이 언제 두었는지 111수가 두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한 시간 반을 보냈다.
역시 온라인 바둑을 열어놓고 다른 사이트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집에 돌아오면서 역시 그쪽 컴을 끄지 않고 다시 접속을 했더니
113이 두어져 있었다.
114를 두었더니 115를 두고 상대방은 또 장고에 들어갔다.
바로 이어서 116을 두었으니 혹시 상대방이 착수를 하고
어디가기 전에 나의 착점을 보았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컴을 켜둔 채 저녁을 먹었다.
저녁상을 물릴 때 쯤 되자 상대방의 제한 시간이 7시간에서
6시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계산을 해보니 이대로라면 새벽 3시쯤에는 어떻게든 결판이 날거라는 짐작이 섰다.
제한시간 6시간이 되자 상대방이 초조감을 드러냈다.
착수가 빨라져서 128까지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128이 마지막 수가 되었다.
128을 두고나니 상대방이 계가신청을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당황했다.
바둑이 다 마무리 되지 않았는데 계가라니...?
그래서 '거절' 버튼을 눌렀는데,
내가 누르자마자 다시 계가 신청이 날라왔다.
가만보니 계가 신청에 대한 수락여부를 묻는 시간엔
상대방의 제한 시간이 멈춰져 있었다.
또 수락여부를 물어보았을 때 조금 지체할라 치면
파란색 바가 꽉 차면서 수락을 한 것처럼 되어버려서
나역시 '거절' 버튼을 누르는 것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상대방이 '계가 신청'을 하였습니다."
"거절"
"상대방이 '계가 신청'을 하였습니다."
"거절"
"상대방이 '계가 신청'을 하였습니다."
"거절"
"상대방이 '계가 신청'을 하였습니다."
"거절"
한동안 '계가 신청'과 '거절'의 공방이 이어졌다.
이대로라면 결국 어떤 식으로든 대국은 파탄이 날 것이고
상대방은 어차피 진 대국이기에 어떤 결론이든 상관 안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공방 중에 아래에 있는 버튼 중에 '한수쉼'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거절' 버튼을 누르고 상대방이 다시 '계가 신청'을 하는 아주 짧은 시간에
'한수쉼' 버튼을 눌렀다.
휴~~~
그 버튼을 누르니 상대방이 당황한 듯 싶었다.
상대방의 제한 시간은 흐르는데 상대방은 착수도 못하고 있고
그렇다고 '계가 신청'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모종의 다른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으리라.
그 사이 대기실에 있는 운영자에게 도와달라는 쪽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곧 운영자가 들어왔고
들어온 운영자에게 help me라고 했다.
(중국고수방이어서 운영자는 중국인인 걸로 알고 있다)
잠시뒤 백승의 결론이 났다.
운영자가 형세를 살펴보고 결론을 내 준 것이었다.
휴~~~
순간 악몽에서 빠져나왔지 싶었다.
그런데 상대방이 또다시 대국신청을 해왔다.
'헉'
그 대국신청을 거절하고 방을 빠져 나오는데
방 번호가 108이었다.
백팔번뇌...
번뇌에 빠지면 잘 빠져 나오돼
애초에 빠지지 않는게 상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PS. 세상이 어수선해서인지 이런 사람들이 주위에 넘쳐난다.
대통령을 잘 못 뽑아서인가?
어찌됐든 상대방 대국자에겐 삶에 대한 투지를 불타오르게 해준거에 대해 감사해야 하나?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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