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말해, 영성은 '우리가 '하나''임을 알고 그에 맞게 사는 일이다.
앞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영성의 가장 큰 걸림돌은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착취를 정당화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핍박은
'두려움'에 먹힌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보수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민주주의'를 모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논리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약육강식이다.
그들은 "'사자'에게 먹힌 사람들"(도마복음 7절)이기 때문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자는 복이 있도다. 그 사자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라.
사자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그 사자도 사람이 되기 때문이니라." (도마복음 7절)
퇴임한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거나 개발을 위해 국민의 희생을 불사한 용산 참사,
국민의 건강권에 대한 기본적 고려도 없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보수신문에게 방송을 주기 위한 미디어법,
국가균형발전이라는 대한민국의 염원이 집약된 세종시의 포기 ...
MB정권 이후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모두
'두려움'이라는 '사자'에 먹혀서 벌어진 화(禍)에 해당한다.
그런데 정작 비극은,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에게 자비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자'의 야수성은 다른 이와 함께 사는 법을 알 수가 없다.
이것이 지금의 정권이 '민주주의'를 불편해 하는 까닭이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잡아먹어야 한다고 알고 있다.
'자본'이 인간의 삶을 고려하지 않고 그리도 포악한 것이
이 '사자'의 야수성 때문이다.
'두려움'과 '자본' 같은 것들은 그 자체가 악이 아니다.
그것들이 쓰여질 자리에서 쓰여지지 않고
인간에 우선할 때 '화'가 있는 것이다.
이 '두려움'을 조장하고 확대 재생산 하는 것이 '사자'언론들이다.
이 언론들은 대중의 '두려움'을 자극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
이 언론들은 대중에게 호 불호를 판단하는 잣대를 제공한다.
물론 그 잣대는 철저하게 '두려움'에 근거한 것들이다.
이것이 언론이 바로 서야 하는 까닭이다.
야수가 된 언론은 사회의 암세포(암세포 역시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같은 존재다.
암세포는 숙주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다.
숙주가 생명을 다하면 암세포 자신도 더 이상 살지 못하면서도
암세포는 포식을 멈추지 않는다.
사실 정권도 언론에게는 먹잇감을 물어다주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언론은 '두려움'을 이용하여 대중을 움직이고
고작해야 정권은 거기서 생산된 잉여물을 분배받는다.
선출된 정권이 언론의 눈치를 살피는 까닭이다.
정리하면 '사자'언론의 야수성은 자신의 배를 채울 줄만 알지
대중과 함께 살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 않은 사회의 암세포라는 것이다.
그럼 사회의 암세포인 '사자'언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엊그제인가, 오랫동안 붙들었던(잘 읽혀지지 않았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떼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작은 부제를 달고 있다.
그 소설에선 <자이퉁>이라는 일간지 기자 퇴트게스를 카타리나 블룸이 권총으로 살해한다.
<자이퉁>지는 왜곡과 과장으로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와 인생을 파괴했다.
누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카타리나 블룸은 자신을 취재하러 온 <자이퉁>지의 기자에게 총을 쏨으로써 스스로를 지켰다.
물론 카타리나 블룸은 법의 심판을 받는다.
소설에서 카타리나 블룸이 총을 쏜 대상은 언론의 야수성이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카타리나 블룸처럼 총을 들 순 없을 것이다.
그러면 프랑스가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을까?
2차대전 후 톨레랑스(관용)의 나라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한 언론인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다음은 당시 드골 정부가 부역 언론인에게 혹독하고 엄중하게 그 죄를 물었던 기록이다.
......
일간 <오늘>의 정치부장 조르주 쉬아레즈는 “프랑스를 지켜주는 나라는 독일뿐”이라고 한 기사와 히틀러의 관대함을 찬양한 기사를 쓴 대가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일간 <누보 탕>의 발행인 장 뤼세르는 신문협회 회장을 지내면서 반민족 언론인들의 사상적 지도자 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사형 및 재산몰수형을 받았다. 독일에 `간과 쓸개'를 내놓았던 <르 마탱>의 편집국장 스테판 로잔은 20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 밖에 독일방송의 선전문을 작성했던 폴 페드로네, 독일 점령 기간중 <라디오 파리> 해설가로 이름을 날린 장 헤롤드-파퀴, 36살의 작가 겸 언론인 로베르 브라지야크 등이 민족반역자로 사형대에 올랐다.
이와 함께 나치 찬양에 적극적·소극적으로 나섰던 언론사도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독일 점령 기간중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은 모두 나치에 협력한 것으로 간주해 폐간시키고 언론사 재산을 국유화했다. 그리하여 900여개의 신문·잡지 가운데 649곳이 폐간되거나 재산을 전부 혹은 일부 나라에 빼앗겼다. 일간지 가운데 처벌을 면한 것은 <르 피가로> 등 3곳뿐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나치점령기 동안 자진휴간함으로써 민족의 양심을 지킨 신문들이었다. (한겨레신문에서 발췌) ...
지금의 정권이 바뀌었을때 대한민국이 2차대전 후의 프랑스처럼
'두려움'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 했던 '사자'언론들을 단죄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지만
만일 그렇게만 돼도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위의 해결 방법들은 폭력의 반작용 같은 것이다. 특히 카타리나 블룸이 사용한 방법은 그녀가 무자비한 폭력의 희생양임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배제되어야 할 방법이다. 그리고 2차대전 후의 프랑스처럼 비록 법의 테두리에서 부역을 단죄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두려움'을 이용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마 영성적인 해결 방안을 고려하지 못한다면 그나마 이 방법이 최선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수께서 도마복음 7절에서 해답을 주셨다.
"사람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자는 복이 있도다."
"그 사자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라."
그러니까 먹어서 사람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하는 것이 '사자'언론을 먹는 것인지는 연구 과제다.
......
잘 씻은 '민주주의'라는 채소에
'사자'언론을 올려놓고
쌈장을 충분히 발라
한 입에 꿀꺽 ...?
그러면 '사람'이 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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