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에서 마법으로 썸네일형 리스트형 소감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완전한 깨달음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너른돌님의 '나는 왜 완전한 깨달음이 없다고 말하는가?'를 읽고 느낀 바를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런저런 일들로 미루다가 오늘에서야 컴앞에 제대로 앉았다. 개인적으로는 게시판에서 너른돌님과 은하수님의 논쟁이 있었던 때부터 너른돌님으로부터 이번 글과 같은 내용을 듣고 싶어 했었던 터였다. 그래서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렇다. 사실 너른돌님 같은 분들은 앞서갔다는 이유로 좋든 싫든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부담을 짊어질 수 밖에 없다. 바둑의 최고수라 인정받는 이창호와 이세돌이 최전방을 끊임없이 탐험하여 많은 애기가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이창호와 이세돌은 그 대가로 많은 대국료를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별다른 대가없이 좋은 글을 통해 이런 나눔을 하는 분들은 .. 더보기 깨달음 있다? 없다? * 다음 카페 에 적었던 글을 옮겼다. ................................................. 개그맨 신동엽이 진행하는 SBS '있다!! 없다!!'가 있는데 그 프로그램이 깨달음은 있다? 없다?를 다룬다면 풀 수 있을까? 어떨 지는 몰라도 꽤 재밌으리란 생각이 든다. 요즘 젊은 방송작가들의 아이디어가 기발하기에 나름 오락적으로 풀어내지 않을까 싶다. 무슨 연유로 이강님이 파에게 탈퇴를 권고하는 일에까지 이르렀는지 모르지만 도판을 서성거리는 이들이 위 주제에 한번쯤은 걸리는 것은 통과의례 같은 것이겠다. 위 주제에 대한 내 견해는 이다. 물론 여기서 지칭하는 깨달음은 자잘한 생활 속에서의 깨달음이 아니라 궁극적인 것을 말한다. 말장난 같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듣는.. 더보기 시즌 2: 빨리 깨닫는 방법 2 서론이 길었는데, 사실 서론이 긴 거치고 제대로 된 게 없다는 속설이 그냥 있는 거 아닌 바에 이번 시즌2가 용두사미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계속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는 뱀의 꼬리일 망정 나름 쓸 데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다. 각설하고, 서론에서 에고의 속성에 대해 자질구레 토를 단 것은 그만큼 이번 시즌2는 에고에 대한 이해가 필수인 까닭이다. 수행은 명상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고 '나'를 주장하는 에고에게 조복을 받는 것이다. 이 과정은 다음처럼 크게 나눌 수 있다. 먼저, 자신이 무지했음을 통렬히 뉘우친다. 명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바른 수행법을 만나 익힌다. 수행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힘을 기른다. 그 힘을 바탕으로 '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것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더보기 시즌 2 : 빨리 깨닫는 방법 1 전에 '빨리 깨닫는 방법'을 소개한 후 나름대로 효과를 본 사람이 있는 지 모르겠다. 그걸 소개한답시고 글을 쓴 나자신도 게을러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실행에 잘 옮기지 못했으니 '빨리 깨닫는 방법'의 제대로 된 임상결과를 기대하기에는 좀 뭣한 면이 있긴 있다. 그런데 그런 뭣한 임상결과마저 없던 1탄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즌2는 기대해도 좋을 법하다. 왠고하니, 1탄은 나의 그女가 어떤 존재로부터 들은 내용이었던데 비해 2탄은 나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실증적인데다가 (물론 주관적이라는 약점이 있지만)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반면에 실패로 인한 후유증이 거의 없을 거라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물론 '깨닫다'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빨리 깨닫는 방법'이 무색해질 수는 있는 소지가 있으.. 더보기 <믿음>에 관한 부연 설명: 살아 돌아온 믿음과 믿는대로 될지어다 착각은 자유라고 했으니까, 이왕 믿음 이야기 나온 거 마저 할려고 합니다. (근데 나, 왜 갑자기 이렇게 쀠~휠 받았지?) 사실, 믿음은 말로 표현되어질 때 훼손되는 성향이 있습니다. 굳건한 믿음은 말해질 필요가 없겠죠. 그러므로 누군가가 '믿습니다.'라고 할때 이것은 엄청난 진술이 되거나 혹은 그 반대로 동어반복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믿습니다'란 진술은 그 안에 믿지 못할 지도 몰라...하는 의구심이 싹트는 것을 내비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도 마지막 순간에,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며 물었듯이 믿음은 그가 깨달은 자든, 어떤 자든 인간에겐 영원한 숙제라고 봅니다. 믿음은 처음에 쉽게 쓰였다가 앎과 이해에 자리를 내주는데 이 과정에서 믿음이 많이 오그라들고 .. 더보기 내친김에 완전함의 기준을 궁리하다가 내친 김에 '완전함'의 기준은 무얼까? 궁리하다가 일단 글을 시작한다. 나는 우리가 늘 보는 자연(自然)이 '완전함'의 완벽한 현현이 아닐까 여긴다. 전에 어떤 글에서도 이 비유를 들었는데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일어선 꽃이 때가 되어 봉오리를 열어 향기를 터뜨리는 것은 '깨달음은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훌륭한 프리젠테이션 같다는 것이다. 봉오리가 열리며 마지막에 터지는 향기는 깨달음의 정점과 완벽한 앙상블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스럽지 못하면서부터 완전함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한편 나는 '완전함'에 대해 생각케 할 수 있는 이것 역시 완전함으로 여기고 감사해진다. 숫자 중에 열 십(十)字가 완성을 뜻하고,완전함을 상징한다는 말이 있는데 수긍이 가는 이야기라 생각하면서, 왜 그런가 .. 더보기 완전한 깨달음?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 바라보기와 이곳(도론도담) 게시판을 살펴보면 '깨달음은 있다, 없다' 논쟁이 로 가닥이 잡히는 느낌이다. 근데 내 딴엔 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한 게시판 분위기가 뭔가 찜찜했던지 추석 명절을 지나는 내내 내안에선 어떤 의문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출근을 하고, 업무로 하루, 이틀 보냈는데 속에서 울리는 '뭐지?'하는 의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자정이 넘었다. 나는 이 꼬리가 잘 잡히지 않는 의문을 파고 들기로 작정을 하고 게시판을 찾아 글쓰기 창을 열었다. 안개 속이라도 일단은 더듬거리면서라도 앞으로 나가보자는 심산인 것이다. '뭐가 깔끔하지 않은 것일까?' ...... 그렇지, '완전히'라는 부사가 주는 위압감이 먼저다. ...... 완전히...? ... ... 일단 더듬어서라도 글을 시작하니 의문이.. 더보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첫걸음- 자신의 무지를 보다 '무지'하다는 소릴 듣고나서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특히 머리형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무지'하다라는 말의 뜻 역시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쉬운 단어이다. 문제는 자신이 '무지하다'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가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무지하다'는 '무지했다'라는 과거형이 되버리는데 그때 내면에선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2008. 9. 8 더보기 그 길은 쉽지 않다? *에 이어 도론도담의 어떤 분에게 썼던 글입니다. 명상이 왜 심각해야 하나요? 명상이 편안하지 않고 심각하다면, 아직 갈길이 먼 건 아닌가요? 제 경우엔 명상이 제 안에 있던 온갖 잡동사니들을 치우고 정리해 주었습니다. 정리하고 나니 휑하긴 했지만 이젠 제법 온기도 있고 좀 어질러져도 치우기도 편해졌습니다. 만일 이 경우에 명상이라고해서 가재도구 하나 갖다놓는데에 의식하고 심각해하고 하면 그게 어찌 명상인가요? 어떤 일을 의식하며 한다는 자체가 ,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입니까? 그냥 쓰던 물건 제자리에 갖다 놓는 일이면 그냥 갖다 놓는 거지요. 굳이 표현하자면 노자의 무위요, 예수의 왼손이 하는 일 오른 손이 모르게 하는 일 아닙니까? 이 자연스러움은 굳이 명상이라고 하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더보기 둘이 아니다? 어느 지점에서 명상은 더 이상 명상이 아니라고 보여질 때가 있다. 삶을 수행이라 여겨왔던 마음자리가 멀어져간다. 어느때부턴 수행이라고 따로 좌선을 한다거나 명상을 해야 한다는 강박도 사라진다. 이런 것을 공과 색이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의식적으로 나를 지켜봄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그러나 이것이 그냥은 되지 않는다. 수행에 대한 절치부심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스스로 멈추어졌을 때 그때서야 피곤한 일이 되지 않는다. 사실 그거 말고 다른 거 할 일이 없기도 하기 때문에 나를 바라보는 일은 오토매틱이다. 그런데 이게 다인가 하는 생각은 든다. 그래서 언제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자못 궁금해지기도 한다. 2008. 3. 10 *다음 카페 도론도담에 올렸던 글입니다. 더보기 깨달음을 구하는 것에 대해 살아가면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된 사람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깨달음을 구한다. 그 집요함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것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집착중에 제일 마지막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물질 세상에서 숱한 환멸을 맛보았거나 트루먼쇼의 짐캐리처럼 이 세상에서의 비상구(EXIT)를 찾고 있는 중인 것이다. 집착의 제일 큰 하중이 실리는 만큼 깨달음을 구하는 일 역시 만만치가 않다. 이미 그것을 구했던 사람들은 알쏭달쏭한 말만 하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마케팅도 하고 있다. 마케팅이야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올바른 깨달음을 사는 것이 아니라면(살 수도 없겠거니와 살 수만 있다면야... 오죽 좋겠어요) 그 거래의 후유증은 건곤일척으로 구하는 집착이기에 쉽사리 치유되.. 더보기 믿음이라는 마법 空인 존재가 현상세계로 나투기 위해 필요했던 원칙이 믿음이다. 당신이 무엇을 체험하는가는 당신의 믿음이 결정한다. 그러니 당신이 맞닥뜨리고 싶은 현실이 있다면 믿음을 점검하라. 자신의 믿음을 왜소하게 하지 말고 완전한 믿음이 되게 하라. 그것은 말이 필요하지 않은 믿음이 되게 하는 것이다. 당신의 믿음이 진실한지는 당신만이 안다. 현실을 탓하지 말고 믿지 않음을 탓하라. 이 순간 당신의 믿음을 위해 우주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다. 2008/02/04 더보기 <무지>와 용기 공교롭게도 자신이 했음을 아는 것은 자신이 느끼게 됐을 때 뿐이다. 의 속성상, 다른 사람의 지적은 전혀 소용이 없다. 자신의 를 돌아보는 것은 에고가 용납하기 어려운 일 중에 하나다. 에고의 상처는 쉽사리 치유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 상처가 피워올리는 분노의 불길은 맹렬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때가 마법의 순간이다. 모든게 남김없이 소진될 때, 비로소 무엇이 피어난다. 화염에 휩싸였을 때는 끝이 보이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수북히 쌓인 잿더미 위로 삶이라는 여전한 새싹이 꿈틀거린다. 그러나 새롭게 돋는 싹은 삶이 어제의 삶이 아니라 한다. 상처로 얼룩졌어야 할 에고가 불태워진 자리에 돋아나는 새싹은 그래서 우리가 절망하지 않아야 할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는 자신이 무지하지 않다라는 믿음이 굳건할수록 더 .. 더보기 비극에서 마법으로 36계 버전 2천여년 전, 예수의 외침이다. 예수는 귀가 있으면서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눈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들어달라고, 보아달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예수의 외침이 거의 쓸모없을 정도로 소모적이라는 데에 있다. 이건 아이러니다. 만일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 외침을 알아들었다면 예수는 굳이 외치지 않았을 것이고 또,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한 예수의 외침이 그들에게 전달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극이 마법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 안의 치워져야 할 것이 있다. 들리는 것을 들리는 그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나'라는 자아, 에고가 떨어져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것도 애매하다. 그 에고라는 녀석은 기를 .. 더보기 누가? 는 무엇으로 보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비극을 마법으로 보든, 마법을 비극으로 보든,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것으로 보든, 결국 보는 자는 어떤 잣대를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닐런지 ... 비극이나 마법이나 ... 그러고보면 비극 속에 마법이 있음이요, 단지 그것을 못 볼 따름이고 마법 속에 비극이 있으니, 단지 그것을 보지 못할 따름일텐데, 이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섞여 있었는데 그걸 나누고 가리킨 사람은 ...... 누고? 2006/11/18 더보기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