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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서 마법으로

이런 비유는 비약이 심한 건가 회사에서 교육방송의 어린이프로그램에 들어가는 한 코너를 제작하고 있다. 엊그제인가 그 코너를 제작하는 PD에게 현장연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때 그 후배PD에게 예로 든 비유가 지나고보니 재밌는 거 같아 글로 옮겨보기로 한다. 현장연출에 대한 이야기는 그 후배PD를 야단치면서 나왔는데 제작편집한 영상이 자연스럽지 않고 작위적인 느낌이 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인위적인 연출을 최대한 배제하는 휴먼다큐멘터리와 달리 그 후배PD가 제작하는 코너는 어린이MC 두명이 일반 출연자와 함께 출연하는 제작의 속성상 최소한도의 설정이 용인이 되는 예능적인 요소가 많은 프로그램이긴 하다. 그런면에서 인위적인 연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그 후배PD의 항변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대부분이라 어찌보면 설득력이 있었다. 그.. 더보기
하나는 둘이요, 둘은 하나다 일즉이(一卽二) 이즉일(二卽一) 2009. 3. 22 더보기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믿음의 충돌에 대해 2 저번 글에 이어서 ... 잘 안되는 까닭은 그 순간에도 머리가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지상정이라고 무언가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머리가 어떤 속셈을 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려운 일이 아니라 이런 경우는 거의 자동이나 다름없다. 머리는 기본적으로 믿을 줄을 모른다. 머리에서는 믿음이 자라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머리가 믿음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믿음을 앎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머리가 앎으로 대체할 수 있는 믿음은 굳이 얘기하자면 믿음의 쭉정이 같은 것이다. 그건 차마 믿음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들인 것이다. 가슴으로, 온 몸으로, 온 존재로 믿을 때 그제서야 믿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석과 같은 믿음'이라고 할 때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다. '아, 이렇게 한다.. 더보기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믿음의 충돌에 대해 1 나도 자주 범하는 오류 중에 하나가 믿음의 충돌이다.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이런 충돌은 의외로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약속시간에 늦었는데, 교통이 꽉 막혔다. 그래서 운전대를 붙들고 이런 불평을 늘어놓는다. "젠장, 오늘따라 어디에서 이 많은 차들이 쏟아져 나온거야?" "하여간 이놈의 나라는 뭐하나 되는 제대로 일이 없어." 무심코 내뱉는 이 진술은 사실 엄청난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그리고 우주는 친절하게도 '더 많은 차가 쏟아져 나오거나,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는 운전자의 선택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도록 하면서...' 이 운전자의 진술에 부합하는 현실을 그가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속에 담겨진 생명력으로 우주에 .. 더보기
깨달음에 대한 잡설(雜說) 깨달음은 무엇일까? 깨달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실로 많은 답변이 가능하고 또 각각의 답변마다 나름의 적절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많은 답변에다 하나 더 보태 본다. 이때, '과연 당신이 깨달음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라는 반문이 가능할텐데 반문(反問)은 반문하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고 이야기를 진전시켜 보겠다. 간단히 말해 깨달음은 오류 혹은 착각의 시정이다. 뭇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은 나와 우주와의 분리감이다. '나'와 세상 ... 그들에게 존재는 최소한 위의 언급이거나 둘 이상인 것이다. 붓다가 수행을 통해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깨쳤다면 예수는 같은 말을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했다. 여기까지가 깨달음이라는 마라톤의 반환점이다. 그리고 이제 위의 두 가르침을 합쳐 '네 이.. 더보기
스승의 길 : 에고의 은근하고 치명적인 거의 마지막 유혹 2 그렇다, 그때에서야 ‘스승’이 필요하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연 앞에서 ‘스승’이 되려하고, ‘스승’ 행세를 하려는 사람은 동어반복의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필요해지는 시점이 있다. 그것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찾아왔을 때이다. 듣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스승’이 된다. 어제 이쯤까지 썼을 때 그女가 아는 분과 함께 회사 근처로 찾아왔다. 같이 온 분은 몇 년 전 방송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알게 된 분이었는데 당시 촬영현장에서 나를 도왔던 그女와는 방송이 나간 이후로도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 친분을 쌓아왔었던 분이다. 저녁 대신으로 알맞게 튀겨진 통닭과 맥주를 마셨는데 술이 몇 순배 돌자 그 분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1년 전인가 그女가 그 분께 책.. 더보기
스승의 길 :에고의 은근하고 치명적인 거의 마지막 유혹1 수행자에게 가장 은근하면서 치명적인 유혹이 '스승'이라는 레테르다. 경지의 깊고 얕음을 떠나서 수행의 완성을 눈 앞에 둔 많은 이들이 '스승'의 역할을 하면서 맛보는 미묘한 자기도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걸로 보인다. 아니 나오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나오려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듯 하다. 이때 개입하는 것이 자기합리화이다. 이 합리화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이라 에고에게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스승'이 되려하는 자는 놓친다. 자기도 모르게 에고가 벌려놓은 달콤한 함정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세상을 구원한다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고 이웃을 위한다는 작은 명분만으로도 에고에게는 큰 기쁨이 된다. 무엇을 위한다는 의식에서 나온 행위는 모두 에고가 벌이는 수작에 놀아난 것.. 더보기
죽음에 대한 2가지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 (1) 오늘 새벽 올린 '죽음'에 대한 질문 2가지에 대한 답을 바로 쓸려다가 조금 뜸을 들였다. '영혼의 존재' 여부도 증명하지 못하는 바에 '죽음'에 대한 어떠한 유추도 가설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설득력 있는 어떤 설명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이견이 별로 없을 듯한 상식적인 선에서의 정황 논리로 '죽음'에 다가 가보자는 것이다. 이전 글의 은 그런 의미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럼, 첫번째 질문 죽음이 일어날 때, 육체에서 사라진 것(호흡이나 의식, 따뜻함 등등)은 무한한 우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일단, 간단한 답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가 되겠다. 이것은 수학으로 '무한 빼기 1은?'의 답이 무한 (무한-1=무한)으로 되는 것과 같다... 더보기
죽음에 대한 질문 2가지 살았으면 죽는 것은 별의 별일이 다 있는 인간 세상의 일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일까? 유사 이래 많은 기록과 성현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 살아있는 인간에게 죽음은 여전히 미지로 남아있다. 십자가에서 다시 살아난 예수나 그 예수가 불러내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라자로를 놓치지 않고 붙들었다면 많은 인류가 더 이상 죽음의 미망에서 헤매이지 않을텐데 ... 많이 아쉽다. 지금 내가 '죽음'에 대해 무슨 말을 할려고 하지만 전생을 기억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임사체험을 한 적도 없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는 흘려버리면 된다. 내가 인식하는 세상은 아주 작건 아주 크건 그 어느 쪽으로도 무한하다. 세상은 혹은.. 더보기
툴레의 <Now>를 읽으며 깨달음의 쓰임을 생각하다 요즘 에크하르트 툴레의 를 읽고 있다. 전에 사뒀다가 손이 가지 않아 제쳐두었는데 지하철 이용시간이 늘어나면서 뭔가 읽을거리를 찾다가 만나게 된 것이다. 이제 한 3분의 1을 읽었나 싶은데 반가운 친구 하나 알게 된 흐뭇함에 기분이 좋다. 그것은 툴레가 얘기하는 '에고'가 내가 알고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툴레는 '에고'를 누구에게나 있는 '기능장애'로 보고 있다. 그리고 '에고'를 자각하는 일만으로도 '기능장애'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문명은 이 '기능장애'가 쌓아온 역사의 축적물이며 이 '기능장애'가 버젓이 존재하는 한 과학, 철학, 예술 등 그외의 어느 분야이건 광기의 발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좀 과격하게 말을 옮긴 면이 있으나 '에고'를 '기능장애'로 보.. 더보기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에고에 대한 선전포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경구다. 이 경구의 다른 쪽엔 '현재를 즐겨라'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다. 이렇게 '죽음'이 언급되면 퇴폐적으로 나가는 게 보통으로 보인다. 그래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니까 지금을 즐기자.'라는 부추김으로 해석이 되고 '될 대로 되라'라는 뜻의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라는 자포자기에까지 이르고마는 것이다. 이 경구들을 퇴폐적으로 해석하니까 그렇지 달리 보면 이렇게도 된다.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기에 '현재에 충실'하여 깨어있겠으며 '당신 뜻대로 하소서' 그리하여 '되어지는 대로, 따르겠나이다.' 내가 보기엔 후자의 해석이 그럴 듯 하기도 하거니와 전자는 막나가고자 하는 인생의 자기 합리.. 더보기
길 떠난 자의 사라지는 아름다움 과문해서 그런지 몰라도 내가 알기로, 정신세계를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깨닫고자 한다. 또, 그들-나를 포함해서-중 대부분이 세상살이가 팍팍하지 않았다면 정신세계를 알게 되지도 않았으리라. 정신(혹은 마음)공부의 열차에 오른 이들이 내릴 종착역은 깨달음이라는 이정표가 붙은 역일 것이다. 물론 이 열차는 도중에 언제든지 내릴 수 있는 열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은 의지를 갖고 열차에서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열차가 종착역에 닿는다는 보장도 없다. 게다가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고는 이 열차를 외면하기가 어렵다. 꼭 그렇지는 않을테지만, 마음 공부라는 여정에 올랐다가 여정을 멈추는 이들 대부분이 이런 아이러니에서 길을 잃고 만다. 종착역에의 도달여부는 오로지 의지가 얼마나 굳은가에 달려.. 더보기
침묵 침묵은 고요에서 나온다. 그 침묵은 침묵을 위한 침묵이 아니다. 그냥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상태다. 오래동안 이 상태가 유지된다면 에고가 떨어져 나간다. 침묵은 그래서 아름답다. 2008. 10. 15 더보기
빨리 깨닫는 방법 부연설명 사실, '깨닫다'에 대한 의미가 워낙 제각각이라 에서 제시한 방법으로 정말 깨달을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시즌1에서 제시한 방법은 그女의 내면에서 들리는 어떤 '목소리'에게 빨리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졸랐을 때 '목소리'가 알려 준 방법이었고, 그것은 개인적으로 많은 효과가 있었다. 시즌2는 그 이후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것이다. 워낙에 게으른 탓에 지속적이고 열정적인 수행을 했다고 자부하지 못하지만 돌이켜보면, 모든 일에 자신을 돌아볼려고 했던 어떤 안테나가 의식의 한 쪽 구석에서나마 세워져 있었던 게 아닌 것인지 ... 그 결과 사티(sati)의 대상이 되었던 내안의 '나'가 어느날 떨어져 나가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것이 떨어져 나갔다.'.. 더보기
Let It Be 신과 나눈 이야기에선가 읽은 것 같다. 미술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그림을 그릴려고 하고 있는 아이 곁에 서서 빈 도화지를 들여다보며 아이에게 물어본다. '그래, 무얼 그릴려고 하는거니?' '하느님 얼굴이요.' 아이가 도화지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대답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그렇다. 그래서 '너는 하느님 얼굴을 본 적이 있니?'하고 묻는다. 그러자 아이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한다. '아뇨. 근데 제가 그리는 대로 놔둬 보세요.' ...... 물론 그 뒤로 아이가 그렸을 하느님의 얼굴에 대해선 더 이상의 언급은 없다. 이런 경우,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道를 구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엉뚱한 것을 붙들고 그것을 놓치기 일쑤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달을.. 더보기